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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칠순을 맞이하여[나의 장로시절(1)] 조회수 : 1481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2-09-09

칠순을 맞이하여(나의 장로 시절)

 

33세의 젊은 나이에  중형교회의 장로가 된 나는 장로라는 직분자체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는 직분인줄 알고, 중대한 책무를 느끼며 매사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의 직책은 교회 내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젊은 장로이지만, 모범된 장로, 충성하는 장로, 양 무리의 발을 씻기는 장로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임직 두어 달 전에 삭발을 하고,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의 신앙사상이 너무나 닮고 싶어서 그분이 즐겨 입고 다녔던 국민복으로 맞추어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고향마을을 찾아가 집집마다 방문하여 타올 한 장씩을 나누어 드리고, 점심식사 후에 마을 이장님의 집으로 모여 달라고 인사드렸더니, 약속 된 시간에 마을 주민 대다수가 마을 이장님의 넓은 마당에 모여 주었습니다.

나는 일일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당시 나의 복음 전파를 요약해보면,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천국은 선행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고향주민 여러분!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불신앙의 삶에서 돌이켜 믿음의 자리, 구원의 자리에 나아 오십시요이였습니다.

복음을 전한 후  신앙인이 받는 복이 무엇이며, 오늘날 선진국이 된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국민들이 그 조상으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은 예화 등 장장 한 시간여의 전도 설교가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되어 예수님을 믿겠다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 했습니다.

지금생각해보면 얼마나 당돌하고 얼마나 투박한 방법의 전도였는가? 속으로 웃음이 나올 정도이었지만, 복음에는 능력이 있어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성경말씀 따라 60여호 200여명의 고향마을 주민가운데 30여명의 (어른과 아이들 포함) 결신성도가 공동체를 이루고, 매주 시오리(6Km)떨어져 위치한 대강면 소재지 사석리에 세워진 사석교회(예장 통합측)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대중교통 수단이 없는 오지 마을 6Km의 거리는 어른들도 도보로는 힘든 거리요, 어린이들에게는 큰 어려움의 거리였습니다. 경운기나 자전거를 이용한다지만 당시 마을에는 경운기를 가진 가정이 한두 가정뿐이어서 그것을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기란 쉽지 않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을 전해들은 우리 부부는 고향마을 가까운 지역에 교회당을 건축하여,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우리 부부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도로변의 집 한 채를 팔기로 했습니다. 당시는 그 집을 농방에 세를 놓았는데 그 집을 매각하여 고향마을인 전라북도 남원군 대강면 생암리 3구 생사리 주변 마을 다섯 중, 그 중앙인 광덕리 초등학교 건너편 남향경사지 산을 매입하여 교회당(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개척 절차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동상교회에 의탁하여가칭 광덕교회개척설립 헌금으로 봉헌하여 동상교회 이름으로 개척하는 식으로 절차를 밟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아  일을 진행했습니다.

드디어 1976 12 14일 장로장립을 받은 것을 감사하고 기념하여 1977 4월부터 예배당공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멘트 벽돌은 황인근 형님께 (고향마을 전도의 첫 열매) 섬진강변 모래사장에서 수 작업하여  만들어 내도록 부탁드리고, 벽돌쌓기 기능공은 둘째누나의 시동생 이춘섭씨에게 맡기고, 목수는 광덕리 터줏대감 장성수 집사님에게 부탁하여 1977 4월부터 당년 8월까지 4개월에 걸쳐 45평의 예배당 건축공사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8월 첫 주일을 마치고 월요일에 부산 동상교회 당회장 권성주 목사님을 모시고 입당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입당하는 날 부산동상교회 성도들과 그리고 고향마을의 새 신자들이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민족의 역사 5천년동안 한 번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오지 중에 오지마을 광덕리에 복음의 종소리가 메아리쳤을 때 나는 가슴이 저리어 옴을 느낄 정도로 하나님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더욱이 예배당 건축을 시작한 달 1977 4월부터 8월까지 편도 6시간이상 소요되었던 머나먼 거리였지만 고향마을에 교회를 세워 영혼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한주간도 빠짐없이 부산에서 토요일에 왔다가 월요일에 부산으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4개월 동안 주일날은 유년주일학교에서부터 장녀부 설교까지 나 혼자 죄다 감당했기 때문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나는 부산에서 가내공업이지만 규모 있게 사업을 진행하는 터라 매일 매일의 생활이 쉴 사이 없이 바빴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향마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놀라운 현실 앞에 조금도 힘겹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다음 주에도 계속)

 

                               이천 십 이년 구월 구일

                                담임목사 손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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