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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칠순을 맞이하며(나의 신혼시절) 조회수 : 1384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2-09-02

칠순을 맞이하며(나의 신혼시절)

 

우리 부부는 결혼하고 일주일 정도 고향을 방문한 것 이외에는 신혼여행이라든지 별도의 둘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고향에서 돌아온 즉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공업용 미싱 3대를 작은 방에 설치하여 예식용 장갑을 만들어 시중 도매상회에 내어다 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능공을 채용하고 보조공을 모집하여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한 공장인지라 기계고장과 종업원들이 주는 스트레스, 고향에서 올라와 오빠를 돕고 있는 누이동생들이 함께 기숙하는 우리 가정은 정서적으로도 늘 불안정했습니다. 매일 원단을 사다가 제단을 하는 일이 나의 몫이었고, 완성된 제품을 거래처에 운반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의 일과 공장의 일은 나를 숨 쉴 겨를도 없도록 분주히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결혼과 즉시 가장과 사장이 되면서부터 가족의 부양책임과 의무감과 사업을 갓 시작한 사업가로써 제대로 해나가야 한다는 긴장감이 나를 사로잡아 그 당시 라면 한 봉지에 50원정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쉽게 사먹기를 아까와 했습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한 나는 인생후배들에게 장가를 가봐야 삶을 제대로 알게 된다고 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또 돈의 귀중함과 시간의 귀중함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 청년들에게는 장가부터 갈 것을 말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돈의 가치와 시간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라고 자주 말해 주면서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혼생활이 분주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 생활은 더욱더 부지런히 수행했습니다. 내가 평생 처음 맡은 주일학교 교사직을 처음으로 맡게 될 때부터 최선을 다하여 수행했습니다. 분주하고 복잡한 신혼생활을 체감하지도 못한 채 끝이 났는가? 생각할 무렵 나는 벌써 세 딸과 한 아들 4남매의 아빠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가 딸 셋을 내리 낳아서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갈망하던 터에 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들이 태어나는 날 교회성도들도 우리 식구들도 모두가 함께 기뻐했습니다. 아들이 무엇이기에 아들을 낳고 난 뒤 나는 한동안 아들의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가장 복된 이름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그 후 한 달 즘 지나서야 이름을 지었는데 성경 빌립보서 4 5절 말씀을 받들어 관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너그러운 성품이 우주만큼 커서 모든 사람을 이해하며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관우(寬宇)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해에 나는 교회로부터 장로 피택을 받았고 부산 노회 고시부의 장로고시에 합격 1976 12 14일 장로 장립을 받게 되었습니다. 33세의 나이로 당시400명가량 출석하는 부산 동상교회 장로가 된 것입니다. 나는 장로로써 성도의 신앙을 북돋아 일으키게 하고 교회의 살림을 전폭적으로 살펴 살면서 자신이 하는 사업 역시 불철주야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유롭게 삶을 살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려는데 목숨을 걸고 열심과 특심으로 충성하려고 애쓰며 살았습니다.

가난한 마을 영주동 철거민들이 모여 사는 부산 동래구 서동(동상동) 마을은 전국에서 모여든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촌이었습니다. 부산시에서 15평씩 땅을 나누어 주고 살라고 버리듯 부어놓은 마을이었습니다. 도로마저 비포장도로이어서 비가 오는 날은 택시도 승차를 거부하고 외면한 마을이었습니다. 가난한 동상교회 성도들은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이었습니다. 나의 사업은 미싱 3대로 시작한 사업이 집은4층 건평 94평의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고 미싱은 30여대 종업원은 아침예배를 드리고 일을 시작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으며 원단을 생산하는 직조기계도 구입하여 직접 원단을 생산, 제품을 만들게 되는 놀라운 물질적 추복을 받게 되었으며 부산시내의 동업자 40여개 처가 연합하여 조합을 형성하고 내가 그 조합의 조합장이 되기까지 이방인들에게도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께 충성하는 자에게 마치 소낙비를 내리심같이 영육간의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

 

                            이천 십 이년 구월 이일

                                담임목사 손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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