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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칠순을 맞이하며(나의 청년시절 2) 조회수 : 1632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2-08-26

칠순을 맞이하며(나의 청년시절 2)

 

우리부대 서무계 업무를 보던 김동호 병장이 1차로 귀국하게 된 후 나는 부대장의 명령에 의해  매일 포탄 탄두와 장약을 싣고 작전지를 다니던 위험한 세월이 끝나 중대 본부 서무계의 업무를 보면서부터는 군대 생활 같지가 않을 정도로 단조롭고 편했습니다. 중대장 김종해 대위는 부산출신 육사를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크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텔레비전이나 선풍기 같은 가전재품을 미군PX(군 면세점)에서 값싸게 구입해서 귀국한 병사들에게 부산 부두까지만 운송해 달라고 맡기는 식으로 가전제품을 국내로 반입시키는 것입니다. 당시는 국내에서 TV. 선풍기 같은 가전제품을 생산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거의 관세를 물고 수입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전쟁터에 와서 돈을 알거나 여자를 밝히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의미 있게 생각했던 나는 동료들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상관없이 부대업무에 최선을 다하여 수행했습니다. 그러한 나를 부대장 김종해 대위는 자신이 귀국할 때까지 연장 복무하다가 가자고하여 100% 잘 활용 했습니다. 그는 야전 전투부대에 지급하는 여러 가지 물건, 작게는 불을 켜는 초 값으로부터 다양한 비용들이 현지에서 구입하도록 현금으로 지급되었는데 이러한 금액은 부대장 자신의 수입으로 정리되게 했었습니다. 내가 타의에 의해 연장복무하고 있던  어느 날 사단 사령부로부터 전통이 내려왔습니다. 내용은 미국 빈넬회사에서 기술자를 모집한다는 것입니다.

지원 자격요건은 세 가지 1)군 제대 법적월수가 넘었고, 월남현지에서 13개월 이상 복무한 사람, 2)영어 해독이 가능한 자, 3)군 생활 중 군법을 범하지 않은 자들 중에서  선별해 뽑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나는 이 세 가지 조건에 다 맞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대장의 허락을 받고 시험에 응시하였고 같은 부대 병사인 이수길 병장, 박범도 병장과 함께 빈넬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겸하여 20일간 귀국휴가도 받게 되었습니다. 20일간 휴가기간은 오고가는 항해 15일 간을 제하면 5일정도 국내 체류기간 이었지만 그리운 가족과 2년간 편지로 사귀어 온 사랑하는 이자야도 만나게 되었고, 파월기술자 근무가 끝나고 귀국하면 결혼하기로 굳게 약속한 상태에서 월남으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본국휴가를 다녀온 후 주월사령부에서 현지 전역을 하고 1968 5월 주월 미국 빈넬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빈넬회사는 군수품지원용역회사로 월남주둔 군 보급품 일체를 하역, 운송, 저장, 군 장비 정비, 보급 분배하는 일을 전담하는 회사였습니다. 당시 나와 같은 현지 취업자는 약 800명가량이었습니다.(백마, 맹호, 비둘기, 십자성, 청룡부대 등 주월 한국군 전체에서 선발한 사람들) 당시 우리의 월급은 초봉이 400불이었는데 당시 환율은 270 1 이었으나 잔업수당까지 합하면 우리 돈으로 매월 15만원으로 되었습니다. 당시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한 달 급료는 논() 3 마지기(600) 값을 받은 셈이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액수 급료이었습니다. 돈이 나의 원수이고 목적이었고 가치었던 나는 이때 동료가 야간작업장에서 압사당하는 사건을 목격했고, 과거 군 생활 중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부터 삶에 대한 회의와 함께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직장동료 경기도 김포 사람 송희영이란 동료가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 신앙인으로 깡마르게 생겼으나 낙천적인 성품의 친구이었습니다. 그는 늘 몸이 약해서 함께 일하는 작업 조에서 항상 건강을 배려 받았던 동료이었습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친구에게나도 교회 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 친구를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깊었습니다. 귀국 후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용인자연농원을 관람하기 위하여 성도들과 함께 갔었는데 용인 자연농원 기념품 판매 가게를 경영하고 있는 송희영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집사로 나는 장로로 만나 지난날들의 추억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빈넬회사에는 한국인 2700, 월남인 7000명의 근로자가 월남 중부 항구도시 캄란 베이에 빈넬 컴파니 타운을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 정치 대국 미국 빈넬회사원, 거액의 월급을 받은 결혼도 하지 않는 20대 국제 근로자, 매일 소고기, 닭고기, 양고기, 아침마다 공급되는 꿀, 한국 근로자라고 특별메뉴로 김치, 규정 외의 근로시간은 더불로 계산되는 급료, 영화, 해수욕, 각종 오락 시설, 지급되는 의복과 신발, 자유로 외출 할 수 있는 근로자 생활은 전쟁터 월남이었지만 가히 천국과도 같았습니다.

누이동생의 수술을 위하여 월남 파병을 지원한 결과 하나님은 나에게 네 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첫째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 둘째 누이동생이 수술을 받아 건강하게 된 일, 셋째 나의 평생 버팀목이 될 배필 이영희(이자야)를 만나게 된 일, 넷째 빈넬 회사원으로 근무하여 앞으로 살아갈 인생길에서 필요한 기본 자금을 마련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동기가 되어 네 가지 큰 복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열심히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내가 빈넬회사에서 하는 일은 하역 업무였습니다. 화물선에 싣고 온 군수품 일체를 캄란 항구에서 하역한 일입니다.

기술을 요하는 일이어서 나는 우인찌 아프레라 기술을 습득하여 일찌감치 갑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열사의 나라 월남 땅에서 해치(배속) 안에서 일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습니다. 가끔 동료들과 함께 해치 안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는 너무나 덥고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도 다른 동료보다 앞서 기술을 습득한 덕에 시원한 바닷바람을 쏘아가며 갑판에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동료들이 항상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기술자 생활이 17개월 정도 지났을 때 빈넬회사가 재계약을 하되 보수를 감액하자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필리핀의 저임금 노동자들과 계약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몇 날 밤을 대사관 노무담당관들과 토론에 토론을 거듭한 결과 저임금으로는 재계약 하지 않겠다. 라고 결론을 짓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우리는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주월 한국 대사관에서 파송한 노무관들이 지금 한국에 돌아가는 것보다 임금이 낮아도 재계약하라고 간청했지만 우리들은 자존심을 상하게 한 직장에서 저임금 재계약으로 일 할 수 없다고 거절해 버린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와서야 몇 번이나 후회스러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저임금이라고 할지라도 당시 한국 경제 상황에서 따져보면 매월 받는 보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는 인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귀국하여 그 해(1969) 12 5일 이자야와 결혼했고 그해 부산시 동래구 서동에 가정집을 구입해서 조그마한 가내 공업사를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 자그마한 가내공업의 이름을평화사라고 불렀습니다. 상표는백마로써 예식장갑을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공업용 재봉틀 3대를 구입하여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

 

                              이천 십 이년 팔월 십구일

                                 담임목사 손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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