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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칠순을 맞으면서 (나의 청년시절 1) 조회수 : 1498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2-08-12

칠순을 맞으면서 (나의 청년시절)

 

지겹도록 가난한 세월 속에서 몸부림치던 청소년시절을 오직 가족들의 생계유지가 지상과제였습니다. 이 같은 소망은 밥을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온 가족이 최선을 다했던 결과로 얻어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의식주가 해결된 후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배울 때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후 나는 징집연령이 채 되기도 전에 소년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이유는 첫째로 소년병으로 입대하여 부사관(당시는 하사관)으로 장기복무를 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1964 6 2일 서울 병무청에 입대 지원서를 제출하여 군대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고향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수와 세 누이동생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었고, 나와 형님은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형님을 징집영장을 받고 입대했고, 나는 소년병으로 입대한 것입니다. 입대한 그 해 논산훈련소 제 26연대 7중대 3소대 소속이었는데 입소하여 열흘쯤 지나 소총 사격훈련을 받고 돌아온 날 밤에 나에게 관보(긴급전보)가 왔으니 연대 본부실로 빨리 나오라는 전달이 왔습니다. 관보는 아버지의 소천 소식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63세의 연세로 파란만장의 일생을 마감하시고 소천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소천하신 날은 휴가 나온 형이 귀대하는 날이었습니다. 부대로 귀대하는 형에게 군대생활 잘하라고 당부하시던 아버지! 그날 아침도 일찍 논밭을 둘러보시고 오셔서 귀대할 형님에게 닭을 잡아 주시며맛있게 먹고 잘 가라.” 말씀 하신 아버지가 형님을 작별하시고 난 뒤 마루에서 낮잠을 주무시다가 소천하신 것입니다. 갓 입대하여 훈련 중에 부친 소천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부대에서 10일간 휴가를 받아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장례식은 끝났고, 마을 앞 논에는 모내기를 위해 저수지 수로에서 물 두레박으로 물을 품어 올리는 중 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소천, 농번기, 훈련병, 가슴에 저미어 든 슬픔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 논두렁에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버지의 소천은 나에게 웃음을 잃어버리게 했고, 명량했던 성품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당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때) 내성적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훈련병의 시절을 지나 부산 병기학교에 입소하여 최우수 수상자로 부산 항만사령관의 표창을 받은 대가로 내가 가는 부대를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선택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38 예비사단에 배속되어 병기중대 교육계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향토예비군의 교육 행정업무를 맡은 나는 매일 강의안을 만들어서 교관에게 제출 강의하도록 하는 일 이었었습니다. 강원도 원주는 군인도시며 겨울이면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곳 이었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배움의 길을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고 형과 함께 군 입대자라는 조건으로 LTS(장기복무자)에서 해제신고가 받아들여졌고 일반 병으로 제대를 기다리는 중에 월남파병 지원을 했고 백마부대원으로 편입 양평에서 그해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동안을 실전 배치 훈련을 받았습니다. 태권도, 사격, 유격훈련 등 깡마른 몸으로 매일 아침 4Km를 구보하여 남한강 지류에서 세수를 했고, 저녁이면 산중 속에 내려져 부대를 찾아오는 유격대 훈련 등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평화의 나라에서 전쟁의 나라로 간다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나는 누이동생(둘째누이 영님이가 비장이 부어 오른 병) 수술을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전쟁터를 지원했습니다.

1966 8 27일 부산 제 3부두에서 우리들을 승선시킨 여객선알렉산더 그래함 벨, 갑판에서 떠나는 부산항을 바라보다가 하얀 종이에 쌓인 돌멩이 하나가 올라온 것을 받게되었고 이 돌멩이가 나와 아내 이자야가 만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승선 일주일후 남지나해를 지난 우리 부대는 베트남 동쪽 중부 나트랑(낫짱) 항구 부두에 도착했습니다. 전쟁터는 무섭고 두려워 사람을 온전히 공포 속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처음 주둔한 지역은 베트남의 중부도시인 남지나해변 선인장 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 투이호아 해변이었습니다. 이곳은 홈바산이 남쪽에 우뚝 서있고 호이안 강의 하루 삼각주 평야지역이었습니다. 넓은 평원이 펼쳐진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김해평야 같은 지역 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20개월 넘게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소속은 9사단 28전투단 966포병대대 제 1중대 탄약보급 하사관이었습니다.

당시 내가 하는 일은 155mm곡사포 탄두와 장약을 투이호아 해변 기지에서 2 1/2톤 트럭에 싣고 주변에 있는 작전지역까지 수송해 주는 업무이었습니다. 40km-80km 거리를 왕복 했습니다. 탄약수송은 적군이 노리는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업무였습니다.

나는 중무장한 병사 9명과 수송부대에서 지원받는 차로 많게는 15대 적을 때는 10대로 거의 매일 탄약을 수송했는데, 2 1/2톤 트럭에는 약 50~60개의 탄두와 장약을 실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많은 차량이 필요했습니다. 포탄 수송은 죽음을 끼고 하는 모험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일반하사 2호봉으로 진급하여 수송관 중위와 함께 이런 업무를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위험업무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12개월 정도 수행하고 포병중대 서무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다음 주에도 계속).

 

                           이천 십 이년 팔월 십이일

                                담임목사 손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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