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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칠순을 맞이하며(나의 소년시절) 조회수 : 1345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2-07-31

칠순을 맞이하며(나의 소년시절)

 

야곱은 아들 요셉을 따라 애굽 바로 면전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앞에 서있는 야곱에게

“네 나이가 얼마냐?” 라고 물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년이니 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야곱이 형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을 때부터 야곱의 일생은 험난한 세월의 연속이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 머슴 생활 20, 형에서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 바친 기도와 절둑바리 장애인생,  딸 디나 강간당함의 애통, 배다른 자식들의 시기와 다툼과 갈등.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 대한 통한의 슬픔, 노년에 고국산천을 떠나 낯선 애굽 땅으로 이주로 인한 영적 고통, 야곱의 집념과 야곱의 야망, 야곱의 기도와 임종,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진 한 인간이 감수하고 살아야 할 모습을파란만장이나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인생여정이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순례자 치고 수월하고 평이하게 살아왔다고 고백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마는 나 역시 수난과역경의 인생으로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으로 패색이 짙어갔던 1943 6 10(음력)에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누님이 두 분, 형님이 한 분, 아래로 여동생이 셋으로 7남매 자녀 가운데 한가운데 나는 네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나의 고향은 전북 남원군 대강면 생암리 3구 생사 마을은 강 건너 행갈산과 성묘산이 병풍처럼 북서쪽을 막아서 80˚ 경사를 이루고 서 있었고, 맑은 섬진강은 은어와 잉어 떼가 서식하기에 좋은 깊은 소()를 이루며 유유히 전남 곡성군 동악산 두루기 모퉁이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내 고향 마을은 개화의 상징인 교회도 없고, 강으로 막혀버린 교통 불편 때문에 밖의 풍경과는 담을 쌓고 사는 오지 중에 오지가 나의 고향 땅이었습니다. 내 나이 아홉 살 때 마을에서 9km 가량 떨어진 옥과리 앞 신작로를 지나다가 생후처음 자동차를 봤는데 어찌나 자동차소리가 겁이 날 정도로 요란스럽고 커서 버드나무가로수를 부둥켜안고 두 눈을 꼭 감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이들이 많고 살기가 힘드셨던 아버님은 여덟 살이 되어도 나를 입학 시킬 생각을 안 하시고 계셨습니다. 나 역시 강가에서 송사리만 쫓아 다녔지 학교 갈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내아저씨 한분이왜 너 학교에 안다니고 놀고만 있느냐? 책망 한마디 듣고 나 혼자서 네 살 위의 형의 책 보에 필통을 싸 메고 광덕초등학교에 찾아가 교장선생님(권이도선생님) 실에 들어가선생님 저 학교 다니고 싶어왔습니다.“ 이렇게 배움의 시작을 놓게 된 것이스스로 헤쳐 가려는 인생의 출발 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6.25사변, 3학년 때 정든 생사마을을 떠나 아버지의 고향전남 곡성군 삼기면 금반리 운곡부락으로 이사해서, 삼기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면서 나는 공부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월간 아동잡지새벗,  나를 스스로 공부하게 만든 가장 큰 길잡이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한 연제소설리터엉 할아버지‘, ’톰 소여의 모험은 어린나의 가슴에 모험의 꿈을 꾸게 해 주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수석 졸업생에게 주는 전라남도 도지사상을 수상했고, 들어가기 쉽지 않는 광주사범병설중학교를 합격한 일은 지금도 나의 가슴에 기쁨어린 추억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원수가 되고 6.25 전쟁의 여파로 황폐 해 질대로 황폐해진 경제는 어린 소년에게서 배움의 꿈을 앗아 가버리고, 보따리 장사로 산골마을들을 돌며, 가난한 집안경제를 도와야할 둘째아들의 몫이 가장 현실적이고 우선적인 의무였습니다. 그때는 의식주의 문제, 즉 생존의 문제가 최우선 순위였습니다.(칠순의 주일을 기하여 다음주에)

 

                              이천 십이년 칠월 이십구일

                                   담임목사 손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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