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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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0년 12월 13일 영원한 경고, 무엇인가? (눅11:37-54 신,113) 조회수 : 399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20-12-16

누가복음 10:38-42에서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식사의 자리에 초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는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있는 마리아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남자 바리새인의 식사초대에 응하셨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이 이 이야기의 초점일까요?

본문에서 쟁점이 된 것은 유대교의 교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정결례에 의하면 식사를 할 때 마다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개념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교리를 무시하시자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45절에서 우리까지...” 이런 표현이 있는 구절을 보면 이때 예수님을 식사의 자리에 초대하고 또 같이 모였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래도 호의적인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리석은 자들아 ...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심한 책망에 몹시 당황한 바리새인은 선생님,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바로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항의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서기관의 말에 예수님은 놀랍게도 더 심한 말로 책망하시며 저주를 선언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에게 호의적이던 바리새인들 까지 예수님에게 완전히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왜 이런 이야기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첫째는 신앙 오류의 심각성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 역시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경건한 삶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라는 말로 저주를 선언하심으로 천국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가르치는 자의 책임입니다.

이런 비극의 원인과 책임은 일차적으로, 아니 전적으로 신앙을 가르치는 자에게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인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의 저주를 선언하셨던 겁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들이 빚어내는 성경해석의 오류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르치려면 먼저 내가 생각하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 번 째는 교리신앙, 즉 도그마에 대한 영원한 경고의 의미입니다.

교리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의 목적이 대단히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굳어져 버리게 되면... 이제 그 교리가 도그마가 되어서 성경의 조명과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로 성경을 판단하게 되어 버리게 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에게 화 있을지어다!” 의 저주를 선언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겁니다. 그러므로 교리신앙은 끊임없는 해석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이 우리 장로교의 신학이고, 개혁주의의 신앙의 원리인거예요. 교리는 시대마다 언제나 재해석이 필요한 거지요. 재해석이 멈춰 버리면 도그마가 될 가능성이 많아지는 겁니다. 옛 계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이런 교리신앙 때문에 실패했던 겁니다. 이는 동시에 새 계약 공동체인 신약의 교회를 향하여 교리신앙에 빠지지 말라는 영원한 경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의 역사는 놀랍게도 옛 구약의 계약 공동체가 걸어 온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겉옷은 기독교의 옷인데 속은 유대교와 다르지 않는 오류의 길을 가고 있다면 화 있을진저의 저주아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음 주 설교의 본문이 될 누가복음 12장에서도 에서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를 화 있을진저의 저주에서 건지신 주인의 사랑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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