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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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0년 11월 1일 좋은 편을 택한 자 (눅10:38-42 신,111) 조회수 : 499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20-11-03

오늘 본문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초청하여 영접했다면 예수님 한 분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까지 모두 마르다의 집을 방문했을 것이고 그래서 마르다는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손님맞이에 분주한 언니 마르다와는 달리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만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 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러한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지고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게 된 것에 대해 지적을 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일이 많다는 것은 그 일로 인한 염려와 근심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염려와 근심이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마르다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비록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서 마음이 분주하도록 많은 일을 했지만, 정작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에게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단지 마르다를 도와 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마리아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고, 자신의 많은 죄가 무엇으로 용서되는가를 알게 했을 겁니다. 결국 마리아는 지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편과, 좋은 편이 아닌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7장의 향유를 부른 여인이 요한복음 11장에서 언급한 마리아와 동일인 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본문의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의 기쁨을 누리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마리아는 단순히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아 용서와 자비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에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였지만 실상 그 마음은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자리에 있었다면, 마르다는 자신의 일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려는 자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편과 좋은 편이 아닌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을 누리며 감사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그 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스스로 염려와 걱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한다는 많은 일들로 인해 마음이 분주해지고 결국 무거운 짐이 되면서 염려와 걱정에 빠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로 인한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계로 부르셨습니다. 이 세계를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놓치게 되면 결국 마르다 처럼 예수님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분주해지면서 염려와 걱정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갖게 됩니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은 언제든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머물러야 합니다, 용서와 자비의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 갇힌 나에게 찾아오셔서 용서와 자비로 나를 살려주신 그 세계를 알게 되고 그것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 세계 안에 굳게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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