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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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0년 6월 28일 누가 예수를 더 사랑하는가?(눅7:36-50, 신 102면) 조회수 : 496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20-07-04

본문은 눅7:17절부터 시작된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긴 평가에 대한 마무리 역할을 하는데 앞에서 29절과 30절의 내용, 즉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했지만,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는 말씀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백성과 세리들의 그룹에 속한, 죄인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소개가 되고, 또 한편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그룹에 속한 자들의 대표로 바리새인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난주일 설교의 결론이었던 35절의 말씀인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이 이 죄인인 한 여인의 변화된 행동 속에서 증명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기를 청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이 초청의 자리에 죄지은 여인의 등장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그 자리에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을 죄를 지은 여자로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동네에서 창녀로 살았던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인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신 것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 발 곁에 서서 울며 자신의 눈물이 떨어진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닦아내고, 그 발에 입 맞추고 옥합에 담아 온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이 여인의 행동을 사랑이라고 말씀한 겁니다. 50절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보면 여인의 믿음은 곧 사랑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이란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시 인간의 선행이나 동정, 연민과 같은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인간의 자기 수양이나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나타나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며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랑은 인간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나라를 세워나가시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들어와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도구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여인과 바리새인의 차이를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과 바리새인의 행동을 비교하시는데 바리새인과 여인의 행동의 본질적인 차이와 이유는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했고, 여인은 자기의 죄를 깊이 그리고 크게 여겼다는 것에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가치성에 붙들린 채 예수님을 초청했을 뿐이지만 여인은 예수님께 나올 때부터 자신의 가치성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3. 그럼, 누가 예수를 더 사랑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자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을 때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시고, 바리새인은 많이 탕감 받은 자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곧 죄 지은 여인이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는 바리새인 시몬이라고 가정하신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여인보다 바리새인의 죄가 적다는 뜻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겼지만 여인은 크게 여겼다는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성에 붙들렸던 마음이 예수님의 용서의 가치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가치와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기준으로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지만 그것 때문에 여인이 유대 사회에서 다른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이 여인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취급 받으며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평안히 가라고 하셨지만 그 여인의 삶은 여전히 평안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이 평안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용서요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평안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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