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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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0년 6월 21일 여러분의 마음에 드십니까? (눅7:31-35, 신 102면) 조회수 : 498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20-06-23

여러분은 세상일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드십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일중 어느 것 하나도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향해서 비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하며, 그 같은 속마음을 감추고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한 편이 늘 불편하지요. 지난 주일에 설교했습니다만, 세례요한이 자신의 제자 두 명을 예수님께 보내서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도 예수님이 하시고 있는 일들이 요한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세상의 모든 일은 그 누구의 생각과 마음에 들도록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예수님의 말에 대해서는 무시하며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세태를 본문의 장터 아이들의 놀이 비유를 통해서 꼬집고 계시는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아마 예수님 당시에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면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두 편으로 나누어서 한쪽 편에서 결혼식의 잔치처럼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의 아이들은 피리 소리에 맞추어서 춤을 추고, 다시 다른 편이 장례식처럼 곡을 하면 또 다른 편의 아이들이 슬피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서로 상대편이 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음으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것을 이 세대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처럼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하며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평으로 삼아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교회에서도 드러내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결국 교회조차도 세상의 방식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면 그 누군가는 예수님이지 인간 그 누구도 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3,34절을 보면 광야에서 은둔 수도생활을 하던 에세네파 사람이었던 세례요한의 삶은 매우 금욕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반인과는 아주 다르게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고, 낙타 가죽옷을 입고 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삶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자신들처럼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은 것을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고 매도한 것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을 가지고 요한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한의 삶을 귀신 들린 것으로 매도한 것이었지요. 반면에 예수님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고 욕을 하면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몰아붙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에 대해서는 먹지 않는 것을 꼬투리 삼아 비난 했고, 예수님은 먹은 것을 꼬투리 삼아 비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세대의 사람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르면 틀렸다고 하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요한을 자신들보다 잘난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자신들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때문에 세례를 요한이 베풀고 자신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요한이 중심이 되고 자신들은 겉으로 밀려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이러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세대의 사람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도 십자가가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것도 나를 높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여러분이 지혜의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증거물은 교회도 세상도 내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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