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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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12월 15일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4:22-30, 신 93면) 조회수 : 757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19-12-17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그리고 고향 나사렛으로 가셔서 역시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시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놀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이 은혜로워서 놀랐다기보다는 은혜로운 말이 그들의 눈에는 분명 요셉의 아들에 지나지 않은 예수님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움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 때문에 거부한 것이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 비해서 한참 뒤떨어진 존재이고, 비천한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4:23)

이 말은 나사렛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바라보는 그들이 반드시 그렇게 말할 것이라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떤 말을 할 것인가를 미리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많이 사용하던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이 속담은 의사라면 남의 병을 고치기 전에 먼저 자기 병부터 고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는 선지자의 말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의 눈에 보인 예수님은 목수 요셉의 아들로 가난하고 눌린 자와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도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포로 되고 눌린 자와 같은 비천한 형편에 처해있으면서도 선지자의 예언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마치 병에 걸린 의사가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면서 남의 병을 고치겠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 같은 속담을 인용하여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는 말로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로

예수님은 이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두 사건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왕상17장에 있는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렙다 과부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왕하 5장에 있는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듣고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크게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동네에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성난 동네사람들의 한 가운데를 지나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의 이야기는 나사렛 사람들이 이방인인 그들보다 못하다는 뜻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들은 메시아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왜 은혜인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놀랍게 여겼으면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그들의 관심이 외적인 형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예수님의 말을 듣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누리게 되는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나 같은 자가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어,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대접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죄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을 뿐이고, 항상 나만 바라보면서 내 일에 몰두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처럼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데오빌로 또한 비록 각하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 무시 받는 것이 마땅한 이방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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