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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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11월 24일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 (눅3:23-38, 신 92면) 조회수 : 517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19-11-27

오늘 우리는 아주 까다로운 본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아주 중요한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오늘 본문 누가복음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구조의 차이는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나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는 것이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남으로써 예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노선을 따라 오신 분이며, 다윗 자손으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임을 유대인들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의 족보는 마태가 생략하고 있는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의 족보를 보면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혈통을 따라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다윗 이후부터 그 노선이 마태복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족보를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신 아들이심을 증거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계신 분이 죄인의 몸으로 오시고 스스로 대속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를 하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본문의 족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위대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족보가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16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심으로 죽음에 갇혀 있던 우리가 해방되어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죄인으로 죽음에 갇힌 나를 예수님이 붙들어 구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그 같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자기 이름의 높아짐이나 영광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할 것은 오직 나처럼 비천한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아담만이 아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들이 사망의 종으로 있던 이름들입니다. 그 이름들이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끝은 비록 하나님이라고 해도 시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면 그 결과는 심판입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고 해도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고 살았다고 해도 역시 심판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에 갇힌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의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에 족보에 기록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의와 용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자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선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복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인생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 축복 안에서 여러분을 다시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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