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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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11월 3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눅3:1-6, 신 92면) 조회수 : 552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19-11-07

우리는 매일 매일 쏟아져 나오는 뉴스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국제, 스포츠, 연예 등등 여러 분야에서 이야기 꺼리들이 뉴스로 쏟아져 나오고 또 전해지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저 팔레스틴의 유대 땅에 이상한 소식이 전해지고, 그 뉴스로 인하여 유대사회가 술렁이게 됩니다. 그것은 유대 광야에서 들려온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뉴스의 주인공은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윽고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례요한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던 그 때,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먼저 정리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세례 요한의 등장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여 요한이 요단강 부근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말을 합니다. 누가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요한을 40:3-5의 말씀을 인용하며 선지자 이사야에 빗대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인용한 40:3-5의 내용은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솔로몬 왕조가 완전히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많은 백성과 지도자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전쟁포로 노예의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던 때를 배경으로 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 때의 유대나라 상황이 세례 요한이 등장할 때의 유대나라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할 때의 상황이 과거 남왕국 유다의 이사야 시대와 동일하게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어렵고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누가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위로가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이사야 401절을 보면 고통 가운데 있는 남왕국 유다 사람을 향해서 외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은 위로하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바벨론에서 전쟁포로 노예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정말 위로가 되려면 지금의 모든 상황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어떤 가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전쟁포로 노예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희망은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위로하지도 못하고, 위로 받지도 못한 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런 고통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40:2)고 외치라고 하십니다. 전쟁 포로 노예가 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근거가 그들의 모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데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은, 이사야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로마의 통치를 받으며 고통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 참된 위로자로 오신 주를 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참된 위로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위로 받을 수 있고, 위로를 줄 수 있는 세상의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세태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원자로 오신 주를 알고 주를 보는 것만이 참된 위로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우리의 죄 문제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죄 문제를 알지 않고서는 주를 볼 수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실상을 눈치 채었을 때 죄 사함이라는 요한의 외침이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게 되고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가 곧 희망임을 알게 됨으로써 위로를 얻게 됩니다.

생존의 문제에 모든 초점을 두고 세상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마음이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심 밖의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말씀의 세계를 들여 본다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마음이 반응합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게 됨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기쁨과 위로로 부요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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