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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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9월 22일 왜 요한인가? (눅1:57-66, 신 88면) 조회수 : 509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19-09-24

우리는 인생을 내 위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내 문제가 중요하고, 내가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인생이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잘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인생의 시작과 끝의 전부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 주관된 인생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의 출생을 통해서 이 같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 자기 위주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 위주로만 흘러간 인생이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인생에 잘되어야 한다.’는 개인의 사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요한의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에 의해서 인생의 전부가 붙들려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인생이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주관되면서 내가 원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길로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위주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아는 것이고, 자신의 인생을 항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름을 요한이라 고집한 이유

여기 아주 특이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의 출생을 통해서 보여주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자식을 향한 시선은 전혀 자기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 위주였습니다. 이 부부는 요한을 자신들의 자식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자신들을 통해서 세상에 오게 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요한을 낳자 이웃과 친족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다면서 함께 즐거워합니다. 아이가 없는 집안에 아이가 생겼으니 당연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난지 팔일이 되자 유대인이 규례를 따라 아이에게 할례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을 부친의 이름을 따라서 사가랴라고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고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은 요한이 자신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출생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지만 자기의 육신적 혈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특별하신 뜻을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로 바라본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요한을 통해서 약속하신 대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봤고, 요한 또한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쓰여 질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은 사가랴가 요한으로 인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믿게 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3. 인생의 가치 기준

말을 하게 된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먼저 요한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속량하시기 위해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일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마리아의 잉태가 자신들을 구원하실 구원의 뿔을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일임을 알았고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가랴는 아이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주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찬양에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꿈과 기대가 없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기대대로 자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서 자라갈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서 지금의 나를 생각하게 되면 나를 이 자리까지 끌고 오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구원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끌어 오신 인생이었음을 안다면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올라 있느냐로 자신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를 아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내게 일하셨음을 고백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하나님 위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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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에서 나눔을 위한 질문 **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나누어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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