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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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9월 15일 두 여인의 만남과 찬양 (눅1:39-56, 신 87면) 조회수 : 604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19-09-17

누가복음에서는 말씀하는 예수님의 구원은 세상의 권세와 부요에 대한 욕망으로부터의 구출이며, 따라서 구원된 자로써 구원의 의미를 알 때 이웃에 대해 베푸는 것으로 그 구원이 증거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누가복음의 의미이며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서로 다른 두 여인

이러한 누가복음의 시각에서 두 여인, 즉 마리아와 엘리사벳 의 만남을 살펴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비교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신 조건의 차이입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이며, 이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지만 마리아는 초라한 나사렛 마을에 거하던 이름 없는 처녀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아이를 가진 것이 말 그대로 복이 되는 일이었지만, 마리아는 아이를 가진 것이 오히려 그를 아주 곤란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여인의 위치 또한 세상적 조건에서 보자면 큰 격차가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아내이며 나이가 많은 어른이었지만 마리아는 말한 대로 초라한 나사렛에 거주하는 여인이었을 뿐이며, 당시의 결혼 풍습을 생각하자면 15-16세쯤 되는 어린 처녀였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가 없던 상태에서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을 만한 복된 일이었지만, 마리아는 15-16세의 처녀가 그것도 정혼한 남자가 있는 처녀가 임신을 한 것이기 때문에 축하 인사는커녕 비방과 책망과 저주를 들어야 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2. 엘리사벳의 성령충만

마리아가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42-45)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외치는데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반응을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가 자신의 주님으로 오신 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로 오신 분으로 인해서 자신도 자신의 아이도 기뻐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반응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엘리사벳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조건 등은 전혀 보지 않은 채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엘리사벳의 성령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상태는 내가 아닌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이 관심의 대상이고, 오직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3. 마리아의 찬양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를 주님으로 바라보며 찬양을 합니다. 또 마리아는 자신이 잉태한 주가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를 찬양합니다.(49-55) 마리아의 찬양을 보면 주로 오신 예수님은 교만한 자들은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는 위에서 내리치시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시는 분입니다. 반면에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의 찬양은 참으로 놀라운 십자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주님에 대한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고백이 인간적 조건과 실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그야말로 말씀의 능력이 이뤄내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여인의 만남과 찬양은 장차 마리아를 통해서 세상에 오실 예수님으로 인해 나타날 주님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조건과 위치와 높고 낮음을 초월한 주님의 세계이며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신자 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나타나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적 조건과 세상에서의 위치 등은 모두 내려놓은 채 다만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 복음이 증거 하는 주님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모두가 비천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처럼 비천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비천한 자리에 있는 우리를 높여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만남에서 나타나야 할 주님의 세계입니다.

이 복된 세계 안에서 여호와 샬롬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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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에서 나눔을 위한 질문 **

엘리사벳의 성령충만을 보면서 성령충만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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