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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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6월 9일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 (마27:1-10, 신 47면) 조회수 : 698
  작성자 : 김성균 작성일 : 2019-06-11

지난주에 저는 마26:69-75 절을 본문으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맹세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가야하는 믿음의 길은 결코 내 힘을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은30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자살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뉘우치고 통곡하고 돌아섰고, 가룟 유다는 뉘우치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로 돌아섰고, 유다는 주님 밖으로 돌아섰습니다. 가룟 유다의 악역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진행되지만, 악역을 자처하고 나선 유다는 자신의 악역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 유다가 선택한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자신이 은 삼십을 받고 팔아 버린 스승이 정죄 받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은 삼십을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하자 유다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놓고 돌아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말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다는 자신에 대해 크게 절망하면서 그 해결책을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유다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자신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죄에 대한 가책이라는 괴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2. 죄와 상관이 없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은 삼십을 돌려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했지만 그들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유다의 죄로부터 자유로움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예수님의 피와는 끝까지 상관없는 자로 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와는 상관없는 자로 남고자 하는 그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은 말 그대로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을 그들은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목자의 가치가 은 삼십인가?

나그네는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으로 유대사회에서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그처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의 묘지로 삼았다는 것은, 그들의 입으로 말한 예수의 핏 값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1:12-13절에 보면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그들의 목자로 일한 것에 대해 좋게 여기거든 품삯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은 삼십을 달아 줍니다. 목자의 일을 종, 한 사람의 가치로 평가한 것입니다. 이것은 스가랴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보낸 하나님의 일을 그처럼 하찮게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4. 나에게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로 일한 스가랴 선지자의 가치를 은 삼십으로 여긴 것이나, 유다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값으로 은 삼십을 받은 것이나, 유다가 던진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이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피의 가치를 그처럼 하찮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또한 하찮게 여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긍휼과 자비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자기 인생에 대한 기대를 갖습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시고 복주시면 인생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물론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는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잘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적 시각에서의 잘됨이 아니라 구원론 적 시각에서의 잘됨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이 있는 신자에게 해당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신자에게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무엇보다 존귀한 것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인생이야 말로 죄에서 해방된 복된 것임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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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를 위한 질문 *

1.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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