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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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성전과 예수님 (마21:12-17, 신, 35면) 09월 30일 조회수 : 651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8-10-21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최후의 한 주간이 시작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한 주간 중, 주일에 새끼나귀를 타시고 호산나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복음서 마다 예수님이 하신일의 시간차가 있는 것은 기록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 성전의 형편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비췬 성전의 형편은 한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이라면 경건한 분위기여야 마땅한데 매매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고 비둘기파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월절 절기행사를 완전히 중단을 시켜 버리신 사건이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성전모독죄에 해당되고, 유대인의 율법을 정면으로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종교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되는 죄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도 나서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제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뒤집어엎어 놓으시고 성전은 기도하는 곳인데 강도의 소굴로 변해 버렸다고 야단을 치십니다.

2.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

예수님은 왜 성전에서 이렇게 분노하시며 이 같은 일을 하셨을까요? 성전은 제사하는 곳이지 제물을 팔고 사는 장사를 할 수 없는 곳이고 돈을 바꾸어 주면서 이득을 취하는 곳이 아니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일까요? 물론 그것도 무관하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존재하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성전의 본질적 의미는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말씀하신 것은 성전의 본질이 곧 죄의 용서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가신 성전에는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소원에 취해있는 무리들, 제사를 통해서 종교인의 의무를 다하려는 사람들, 그들에게 제물을 팔고 환전을 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묵인해 주면서 이권을 챙겨서 자기 배를 불리려는 사람들로만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강도의 소굴로 보신 것입니다.

3. 자신의 불쌍함을 보지 못한다면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 일들을 이상하게 여겼고 또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소리 지르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면서 예수님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라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인데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리 지르기 때문에 예수님께 너를 하나님이 보내신 왕, 메시아라고 소리치는 그런 말을 듣고도 왜 가만히 있느냐라고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분노에 대해 예수님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이 곧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실 분으로 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으로써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찬미를 온전케 하실 성전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미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고, 참된 성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의 복된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의 죄인 됨과 멸망의 존재로서의 불쌍함을 깨닫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을 구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고 신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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