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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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부르짖음의 절규가 있는가 (마9:27-38, 신,14면) 8월 13일 조회수 : 815
  작성자 : 김정훈 작성일 : 2017-08-18

마8-9장의 10가지 치유기적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잘못된 신앙을 마치 ‘헌 가죽부대’로 비유하시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종교인 유대교에 대하여 사망선고를 내리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10번째는 맹인을 고치시는 치유의 기적으로 시작되어 말을 못하게 만드는 귀신을 쫒아내셔서 치료하셨더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귀신들려서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이런 일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을 하는데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10가지 치유기적 사건의 결론을 어떻게 마무리를 하고 있는지를 사건의 현장을 방문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찾아 갈 곳은 두 맹인이 고침 받는 현장입니다. 맹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가“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면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는 자들을 책망하시거나, 피해 버리시거나, 받아들이지 않으셨지만 몰라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희가 잘못 알고 있다고 굳이 책망하시지 않으시고 아무에게도 소문내지 말라 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맹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그 소리는 그들의 절박한 절규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심정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중에도 그들을 고쳐 주신 것은 그들의 절박한 심정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맹인이 치료 받고 집에서 나갈 때에 사람들이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오자 귀신이 쫒겨 나가고 말을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서 그런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으로 볼 때 예수님이 맹인을 치료하고,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것은 귀신들려서 하는 일이며 귀신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고, 귀신이 들려서 벙어리 되고,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벌거벗은 채로 예수님에게로 달려가는 소경의 모습은 전혀 교양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짓들은 더러운 귀신이나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은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맹인이 ‘눈을 떴거나 말거나’ ‘귀신이 쫓겨 갔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런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도 똑 같이 귀신들린 사람이 하는 일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대로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하여 왜 그렇게 엄하게 책망과 저주를 퍼 붓고 계시는지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 이런 신앙 아래서 고통을 받고 있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온 자들은 다 몇 십리, 몇 백리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다 지쳐있었습니다. 굶주려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예수님은 이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마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이 말이 무슨 이야기인가요? 불쌍한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이들을 불쌍하게 보는 사람은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을 보내 주소서. 라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예수님의 통곡하시는 심정입니다. 이것이 10가지 치유기적 사건의 결론입니다.

혈루증으로 앓다가 다 빈 털털이가 되어서, 완전히 죄인이 되어 갈 곳이 없는 슬픈 여자. 이 여자는 예수님에게 찾아와 절규하는 것입니다. 맹인들처럼 목소리로 절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절규하면서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분의 옷자락만이라도 잡아 보리라. 그 여자가 옷자락을 잡는 손길을 통하여 예수님이 느끼신 것이 무엇일까? 이 여자의 한 맺힌 절규입니다. 이 여자의 손길이 예수님의 발길을 멈추어 서게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당으로 올 때는 어떤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와야 하는가?

나는 어떤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나와 있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할 그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은 둘러보시며 찾고 계십니다. 내 걸음을 멈추게 할 자가 없느냐? 교회에 이런 한 맺힌 절규를 가지고 찾아오는 자가 있는가? 하나님을 그래도 바로 믿겠다고 나왔는데 그 분의 걸음을 멈추게 할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한 맺힌 절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케노시스 성경대학, 케노시스 주일학교는 이 심정으로 열어가고 있는 겁니다. 힘들지만 이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한, 여러분들의 믿음을 맡은 목사로서, 여러분과 다음세대를 향한 힘없는 목사의 절규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절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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