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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로마서 특강4, 하나님의 의의 계시(롬 1:1-8:39) 김희중 목사(20210430) 조회수 : 330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1-06-01

로마서특강4(롬 1:1-8:39) 김희중 목사(20210430)

20210430 로마서 04

1, 하나님의 의의 계시 (1:1-8:39)

. 머리말 (1:1-17)

1. 인사말 (1:1-7)

인사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의 자기인식또는 바울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2. 바울의 관심사 (1:8-15)

신령한 은사(복음 = 예수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출처)를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는 일에 빚진 자라고 말하며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서의 사명에 붙들린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빚진 자 의식입니다.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1:16-17)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만한 능력이나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주체가 되어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받아들여 믿게 하심으로 주님으로 영접하게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그 믿음 안에서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며, 역사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 입니다.

. 정죄(죄가 있다고 판단하고 단정함) :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 (1:18-3:20)

1. 이방인의 죄 (1:18-32)

정죄의 원인 :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이 원인 (1:18-23)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만드신 만물에 스스로의 흔적을 남겨 놓으셨고, 그러므로 인간은 얼마든지 만물을 통해서 신에 대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자체를 믿어 버림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죄악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정죄의 결과 : 하나님의 유기(버려두심) (1:24-32)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을 마음의 정욕대로 마음대로 살도록 그 더러움에 내 버려두시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내버려 두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몸을 서로 욕되게 하는 것이고(24),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고(25), 창조의 순리를 벗어나서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취하게 되고(26,27),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미움, 능욕, 교만, 자랑, 부모 거역,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29-31) 등등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죄를 하나하나 나열해서 드러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이 마귀로부터 지배받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죄를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함 때문이라고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고 나서, 로마서 2장부터는 유대인의 죄를 이방인들의 죄와 동일시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유대인의 죄 (2:1-3:8)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로마서의 핵심인 복음과 구원”,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대한 대 주제를 내 걸고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 먼저 죄의 문제를 논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장의 말씀에서 선민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유대인의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 특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였으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아주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로마서를 읽어가면서 먼저 유념해야 할 문제들이 있는데 먼저는 문맥의 흐름에 대한 이해입니다.

로마서를 통한 바울의 복음에 대한 강론은 이미 1장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인간의 죄 문제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이야말로 인간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존재라면 구원이라는 말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의 당위성을 강조하여 전하기 위해 인간의 죄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고발하므로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들의 참람한 죄악상을 폭로하였거니와(1:18-32) 로마서 2장에서는 이제 유대인의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으며, 이런 내용은 로마서 3장에 까지 계속됩니다. (2:1-3:8)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죄인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도 똑같이 죄인임을 증명하므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3:9-20)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기독교 신앙체제를 알리고자 함에 있어서 인간의 죄 문제(罪論)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이런 내용은 로마서 1:18절부터 320절 까지 계속되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바울의 구원론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주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는데 가상의 대화상대(비판자)를 설정해 두고 그로부터 나올만한 질문이나 반론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로마서가 기록되었다는 점이 좀 특이한 점입니다.

로마서 2장인 본장에서 바울은 누군가를 향해서 계속 그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암시를 주지 않지만 차츰 차츰 그 대상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앞장인 1장에서 바울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던 가상의 대상(인물) 또한 바로 유대인들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기 위하여 먼저 이방인들의 죄를 언급했던 겁니다.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유대인의 민족적인 속성을 잘 지적하면서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유대인이나 똑같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로마서 2장의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읽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첫째 부분은 기본명제로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1-11절에서 강조 하였고,

둘째 부분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유대인의 생각을 부정해 버리는 말씀이 12-16절이고,

셋째 부분은 유대인들의 율법 위반, 즉 죄악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내용이 17-24절이고,

넷째 부분은 할례의 특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 있는 내용이 25-29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진리에 따른 심판 (2:1-5)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Rom 2:1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당신은 왜 그렇게 끔찍한 사람들 얘기만 합니까?' 하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여러분 역시 그들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자들은 악한 사람들이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러분이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와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형식을 가상의 대상을 정해 놓고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의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비도덕적인 인간에게 내리는 이러한 심판고지에 찬동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이 동일한 방식으로 그러한 심판에 처해 있지 않은지를 살피지 못하는 사람을 아주 날카롭게 힐책합니다.

그리고 이런 논리의 배후에는 유대들과의 논쟁이 이미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1절 말씀의 시작을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을 하는데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문법구조를 사용하는데 21절의 그러므로 도 그런 용법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판단이란 비판을 말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자의 위치에서 주님께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돌 던지는 자의 위치에서 몰려왔던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판단을 받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자기의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만 드러내고 판단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필연코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너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되어서 나와 상대방을 같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판단 받아야 할 사람임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단순히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행동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네 자신이 하나님으로 판단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이것을 묻는 이유는 나 자신에게서는 결코 판단이 기준이 될 만한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율법을 지킨다느니, 노력을 해야 한다느니 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Rom 2:2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정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판단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법원의 판사가 판결해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판사가 판결해서 온전하면 최후의 재판이 없겠죠.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이 있어요. 흰 보좌 심판이지요.

왜냐하면 사람이 판결한 게 시원찮으니까..

전도서3:16절에 보면, 또 내가 해 아래서 보건데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재판하는 곳에도 악이 있더라는 거예요.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Rom 2:3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때는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지만 여러분이 저지를 때는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

유대인이면서 동일한 죄를 짓는 너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Rom 2:4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오래 참고 계시다는 것을 정녕 모르십니까 ? 아니면 그런 것은 생각조차하지 않는 것입니까 ? 하나님께서 즉각 벌하지 않고 오래 기다려 주시는 것은 단지 여러분이 죄에서 돌아설 시간을 주기 위한 것임을 왜 모르십니까 ?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회개하기를 따뜻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많이 강조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죄인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회개로 인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스스로 회개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싶어서 회개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한 것은 다만 인간의 뉘우침이고 종교적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아는 신자라면 회개를 하고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인도하셨음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자신의 공로로 앞세워서 자신의 회개를 선의 기준으로 삼아버리고 회개치 않은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나를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를 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5절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Rom 2:5 그러나 여러분은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져 죄에서 돌아서기는커녕 자기가 받을 무서운 벌을 쌓아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심판관으로 온 세상을 다스릴 형벌의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벌 받을 거리를 만들면서 계속 살아가요.

삶 자체가 하나님께 벌 받을 것을 계속 쌓아올리는 것을 모르고 한 번도 괜찮고 두 번도 즉각적인 하나님의 벌이 임하지 않고 괜찮으니까 그런 것을 예사로 한다는 거예요.

행위에 따른 심판 (2:6-10)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Rom 2: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ㄱ)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 62:12(참조,24:12))

각 사람에게 라는 말이 구약성경에서는 잘 안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대개 지파별로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 즉 연대책임으로 물으셨다면, 신약시대에는 거의 한 사람 한 사람 각 사람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원어로 헤카스토스 라는 말인데 각 사람에게” “각자 각자에게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뭘 한다고 따라하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부 각 사람에게 묻는다는 겁니다. 구역별로 묻는 게 아닙니다. 교회 단위로 묻는 게 아녜요.

정통 교단? 아무 소용없어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묻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 7절입니다.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Rom 2:7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참을성 있게 실천하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영광과 명예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맨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그 말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요.

117절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이 부분을 설명할 때 말씀드렸지요?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그 믿음은 전에 앞에서 설명했던 것과 같이 피스티스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신실함으로 충성됨으로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그 믿음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충성됨이 뭐냐면 먼저 참아야 돼요.

기분 나빠도 참고, 인격적으로 견디기 힘들어도 참고, 유혹이 있어도 참고, 하여튼 이 참는 것이 기본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인내하고 참는 게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참고 선을 행해야 돼요. 악한 생각이 나도 참아야 돼요.

참고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하시고...했는데

여러분, 이게 믿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믿음이 뭐냐? 이렇게 묻는다면,

믿음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추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믿는 것그게 믿음이에요.

예배당만 다니고, 세례만 받으면 그냥 아무렇게 살아도 천국 간다.” 그런 게 믿음이 아니고, 반드시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추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믿어야 그게 참 믿음이죠.

그러므로 믿으면 참고, 선을 행하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그게 믿음이고, 그래서 그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8절을 보세요.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Rom 2:8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고 악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진리에 서려면 교회 안에서 어떤 무리에, 또는 어떤 그룹에, 편을 지어가지고 그렇게 모이게 되면 진리를 쫓기 어려워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참 사람이 괜찮은 것 같은데...,어떤 일로 한 편이 되어서 행동할 때 보면 진리에 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미 한편으로 치우쳐 버렸거든요.

사회에서도 개개인을 만나보면 매우 도덕적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떤 단체행동을 할 때 보면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갑니다.

멀쩡한 사람들이 머리에 붉은 띠만 두르면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아무 것도 안 돌아보고 자기들의 주장과 이익을 위해서 바로 결사 로 나와요.

여러분, 혹시 어디에서 투쟁이나 그런 것을 하게 되더라도 머리에 붉은 띠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결사(決死)” 그것도 하지 마세요. 그 말은 목숨을 걸고 죽음으로 싸운다는 뜻인데. 임금 조금 올려 받겠다고 거기에 목숨 걸면 안 되잖아요. 하여간 제 생각에는 결사그런 것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모습이 추해져요.

성경에 당을 짓는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그때 말하는 이라는 말이 음모라는 의미로 되어 있어요.

헬라어에 원어에 보면 에리데이아라는 말은 음모를 꾸미는 당이에요.

그냥 보통 당이 아니고 아주 음모라는 것은 그늘에 숨어서 모의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많이 조심해야 돼요.

우리나라에 대선이 앞으로 1년이 채 안 남은 것 같은데 선거 때 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나누어져 가지고 저 사람은 00, 저 사람은 00당 이러면서 갈리게 되는데... 여러분, 그냥 우리는 예배당하고 말아야 돼요.

많이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악을 행하는 사람들, 당을 지어서 악을 도모하는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각 사람에게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9절이지요?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Rom 2:9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겠지만

영에는 라는 단어의 헬라 원문에는 입니다.

이면 프뉴마이렇게 해야 되는데, “프뉴마가 아니고 푸스케예요.

푸스케하는 것은 혼. 혹은 생명, 목숨, 또는 사람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서 우리 몸을 2분법으로 말할 때는 그저 푸스케내지는 사르크스그러는데 사르크스는 살, 고기덩어리 이런 거죠.

그 다음에 3분법으로 하면 사르크스푸스케프뉴마이렇게 육과 혼과 영이렇게 나눌 수 있어요.

스피릿(spirit) 소울(soul) 바디(body) 이렇게 나눌 수 있죠.

그리고 여기 아마도 푸스케할 때는 이게 목숨 혹은 영혼 이렇게 해야 맞을 거예요.

그래서 영에게만 아니고 혼도 포함된 푸스케니까, 이게 영에는이라고 하면 올바른 번역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요. 그래서 각 사람의 영혼에게 이렇게 해야 맞습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이 말씀은 뒤에 10절에서 반복됩니다만 구원이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우선인 겁니다. 언약과 약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 복을 거절한데에 대한 형벌도 유대인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을 부여한 자에게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의 대표성이 부여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Rom 2:10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여러분,

7-10절까지에서 말하고 있는 선과 악은 무엇일까요?

분명히 7절과 8절에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10절에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인간을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구분하듯이 하나님도 역시 인간을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선한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악한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하는 선과 악은 윤리와 도덕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구분하십니다.

세상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윤리라는 틀에 합당한 사람이면 선한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선한 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선한 자가 되었다가 아니라 선하신 예수님 안에서 선한 자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절에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선한 행위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 다른 말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선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버려진(유기) 인생에게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도함 받아 자신의 죄를 아는 회개에 이른 자들에게서 보여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8절 말씀처럼 당을 지어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것, 세상의 것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선한 일이란 예수님 안에서 남을 도와주고 착한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만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쓸데없는 일에 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주님이 오시면 세상은 끝나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나그네로서 부족한 것이 있고, 남들보다 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래의 영생의 나라를 바라봄으로서 미련을 떨쳐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율법을 잘 지키고 교회를 잘 다니는 종교 행위를 통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구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그네로 살아서 구원받자는 것은 아닙니다.

나그네로 산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택함 받은 자로서 주님 안으로 부름 받은 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서 세상이 아닌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더욱 추구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발견되어진다면 그것은 저주 아래 있던 나를 택하셔서 믿음을 더해주신 결과임을 알고 감사할 뿐입니다.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Rom 2:11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11절의 이 말씀은 앞에 1-10절 말씀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인 12-29절의 말씀을 연결해 주는 다리역할을 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는 어떤 불공평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도 편파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한 단락인데 (1-11)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진리의 척도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장에서 이방인들의 죄와 그에 대한 심판에 대한 말씀에 공감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들이 범한 판단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들 역시 하나님의 공명정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이 단락의 마무리 논지이며 중요한 주제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똑같이 도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단락에서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기 위한 기초 작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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