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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로마서 특강3, 하나님의 의의 계시(롬 1:18-39) 김희중 목사(20210423) 조회수 : 328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1-04-28

20210423 로마서특강3(롬 1:18-39) 김희중 목사

20210423 로마서 03

1, 하나님의 의의 계시 (1:1-8:39)

. 머리말 (1:1-17)

1. 인사말 (1:1-7)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의 자기인식 또는 바울의 자화상

2. 바울의 관심사 (1:8-15)

신령한 은사(복음 = 예수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출처)를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는 일에 빚진 자라고 말하며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서의 사명에 붙들린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빚진 자의식입니다.

지난주에,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Rom 1:14 나는 헬라인과 같이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나 야만인과 같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나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무거운 전도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빚진 자에 대해서 좀 길게 이야기 했었지요?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은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기 위함이었고, 신령한 은사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알게 된 예수님을 서로 나누는 것이 사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과 나누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은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하셔서 믿었다'는 겁니다.

즉 주님께서 일하신 그 결과로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이 전하려고 하는 복음이었고, 이 복음이 신자를 견고하게 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이 일하신 그 덕분에 생명이 주어진 이 기쁜 소식, 복음을 나눠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견고한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를 포기 (자기 부정) 함으로서 시작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서의 믿음이 주어지면 내 안에서 나의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중심적인 믿음(신념)은 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며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신자는 오직 주님이 하신 일만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를 포기할 수 있고, 자기가 포기되어진 이상 자신의 일 때문에 흔들리고 낙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도록 성령께서 일하시는 거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눠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빚진 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은 나를 복음을 나눠주는 그릇으로 쓰시고자 함이다이것이 곧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결국 바울은 '나 같은 자가 부름 받은 것은 내가 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빚진 자'란 말을 한 것입니다.

즉 내가 잘나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너희들 때문에 부름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빚진 자의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Rom 1:15 그러니 로마에 사는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복음 전하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는 것입니다.

왜요? 빚을 졌으니까... 그렇죠?

그런데 로마교회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데 또 무슨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까?

결국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한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를 아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 복음은 주님을 앎으로 자신이 포기되어지는 복음을 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빚진 자로 신령한 은사인 이 복음을 나누기 위해 로마로 가고자 했던 거지요.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1:16-17)

그리고 16절에 보면,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Rom 1:16 [믿음을 통한 구원]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리지 않고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소식이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초청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끄러움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는 결코 복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부끄러워하면서 복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허물을 덮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담대하게 어디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복음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빚진 자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나누는 신자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만 의지하는 자에게는 복음이 능력입니다. 자기 행동을 바라보지 말고 내 대신 피 흘리신 그분이 하신 일만 의지하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능력의 복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여기까지 했었지요?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Rom 1:17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인정해 줄 자로 만드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 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 2:4)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왜 복음이 기쁜 소식인지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만한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주체가 되어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받아들여 믿게 하심으로 주님으로 영접하게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그 믿음 안에서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며, 역사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고, 성령하나님이 오셔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까지도 책임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 자들이지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 놀라운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살아야 되는 거지요.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내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할 뿐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자기 자랑도 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니,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복음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눠주고자 한 것입니다.

. 정죄 :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 (1:18-3:20)

1. 이방인의 죄 (1:18-32)

정죄의 원인 : 무지 (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Rom 1:18 [인간의 타락한 모습]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밀쳐 내는 사악한 모든 인간에게 하늘에서 진노를 내리십니다.

여러분, 여기를 보면,

옳지 않은 것을 가지고 옳은 진리를 거스르고 훼방하는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람의 특성이 뭐냐 하면, 순리로 써야 할 것을 역리로 쓰면서도 그것을 옳다고 우겨댄다는 거죠.

지금 동성애자들과 그것을 옹호하는 자들의 논리가 그렇잖아요?

그게 차별금지법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래도 조금 잘못된 것 같으면 궤도를 다시 잡을 수 있는데 아주 거꾸로 가는 사람은 곤란한 겁니다.

완전히 역리로 간다고 하면 그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참 두려운 말이 하나 등장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유기(遺棄)하셨다,” 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좀 어려운 말인데 하나님께서 버린 자식들, 포기해 버린 사람들, 하나님께서 아예 사탄에게 내어준 사람들, 지옥에 넘겨준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표현이 여기 로마서 1장에서 3번이나 나와요.

24절에 내버려 두사라고 나오고, 26절에 내버려 두셨으니이렇게 나오고, 28절에 내버려 두사이렇게 나오는데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셨으니, 내버려 두사 이 내버려두셨다는 말이 참 어려운 말인데, 헬라어로는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예요. 이 단어의 뜻은 포기하다, 넘겨주다, 내버려두다, 내어주다..’ 이런 식으로 의역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잘못되어도 어느 한계가 있어야지, 완전히 거꾸로 갈 정도로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지적을 받으면 양심에 찔림을 받고 회개할 여지가 있어야 되는데 오히려 악한 것들이 의롭고 옳은 것을 대적하면서 그것을 즐기거나, 끝까지 고집하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버린 자식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포기했는데, 누가 뭘 어떻게 해 볼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도 원하시기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원하시면 다 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유기하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좀 생각하면서 읽어 보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수많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두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거의 다 안 이루어져요.

구약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아니 하나님이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지면 무엇 때문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하겠어요?

구약성경에 그 수많은 하나님의 진노들은 하나님의 과분한 화가 아니거든요.

최소한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소원들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진노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결국은 구원받지 못할 겁니다.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자기 기분에 맞춰 다니다가 제풀에 물러가버리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성경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즉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바라시고 원하시지만 바라시고 원 하신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이런 것 잊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도 원하시고 소원하고 바라시고 해도 안 이루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래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은 눈물과 통곡과 탄식인데...... 우리가 내 소원이나 내 목적이나 내 기도가 안 이루어진다고 새삼스럽게 낙심하고 삐치고 할 게 아니라고요.

여러분 성경을 제대로 보세요. 그리고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보세요.

눈물과 통곡과 탄식의 그 심정을 좀 보세요. 얼마나 하나님의 그 소박한 소원이 안 이루어져서 애태우시는지...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Rom 1:19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4)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Rom 1:20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인간들은 땅과 하늘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 그분이 어떠한 분이며 또 얼마나 위대하고 능력이 영원한 분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의 속에 보인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에서 나타나는 신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신지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신을 찾고 하나님을 찾지만 그것은 결국 신을 따르고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20절에 ...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 .

즉 보이지 않는 분이 영원토록 보이지 않는 분으로 계셨다면 인간으로서도 할 말이 있겠지요?

'세상에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라는 핑계를 댈 수 있지 않겠어요?

즉 하나님을 믿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보여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능력과 신성이란 '하나님 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만드신 만물에 스스로의 흔적을 남겨 놓으셨다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얼마든지 만물을 통해서 신에 대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거지요. 그러나 보이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다만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보이는 것 속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으로 보면 다 해와 달과 지구가 똑 같은 것처럼 보여요. 그렇죠?

일식이나 월식 때에 나란히 겹쳐져서 그림자를 보면 세 개가 똑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 태양은 우리 지구보다 자그마치 100만 배나 큽니다.

그러므로 태양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지구를 집어넣는다면 지구가 태양 안에 지구가 100만개나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과 지구의 거리를 적당하게 조절해가지고 크기가 똑같아 보이게 그렇게 창조하시고 운행하도록 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런 정밀함이라든지, 세포 세계의 정밀함이라든지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체에 있는 혈관을, 아주 가는 저 모세혈관까지 한 선으로 이어 붙이면 그 길이가 10km 정도라는 거예요. 이 길이는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돌아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정밀한 세계를 옛사람들은 알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래도 핑계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하물며 오늘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현대사회에서 조금만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과학을 공부하면 하나님이 만든 이 우주와 또 지구와 이 물리와 화학과 그 열역학과 양자역학이라든지 이런 것들..... 아니면 양성자 중성자 그런 소립자까지 해서 원자운동이라든지 이런 엄청난 것을 보게 되면 절대로 핑계를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온 인류의 지성을 다 긁어모은 것 보다 더 높은 지성을 가진 어떤 분이 지적으로 디자인 하셨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요즈음에는 하나님을 안 믿어도 지적 설계이론은 진화론이라든지 무신론을 능히 깨뜨려 나갑니다.

지적 설계이론이란 말은 만드신 만물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질서나 법칙이라는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지성의 산물입니다.

여기에서 바울도 절대로 핑계치 못한다.’ 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이 없어서 못 믿었다는 그런 변명도 하나님 앞에 가면 안 통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연히 생겨나게 되었다고요? 그런 사람에게는 천국도 없습니다.

최소한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보면서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구나.

만드신 분이 있겠구나....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지요.

물론 아직 그것을 만드신 분이 누군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배우고 알게 되면 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신지식은 인간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까?

보이는 것을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절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알 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지만 보이는 것 자체를 믿어버림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진노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여러분, 그런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오셨는데 무시 받고 멸시받을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Rom 1:21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 커녕 날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시는데도 감사조차 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또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리석은 생각마저 품고, 그 어리석은 생각에 아둔해져 분별력조차 잃어버렸습니다.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Rom 1:22 하나님 없이도 현명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와는 반대로 완전히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Rom 1:23 그들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대신에 나무나 돌로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형상을 본뜬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거꾸로 바뀐 거예요.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은 사람보다 못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사람 손으로 만든 것 치고 사람보다 위대한 것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최소한도 누가 머리가 천재가 되라는 것은 아니라도 기본으로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 치고 사람보다 위대한 것은 없는 거죠. 그래서 우상을 섬긴다든지 이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지요.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을 알았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과 감사가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것, 즉 우상에게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았으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신자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신지식이 아닌 성령을 통해서 깨달은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반응인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썩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썩어질 세상에 썩어지지 않는 몸으로 오신 분이 누구신가를 보면 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썩어지지 않을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헛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감사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에 담겨진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알고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고 감사치도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몸에 담고 나타나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알게 하심과 믿게 하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기적 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 알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헛된 것만 의지했던 불의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최고의 희망이요 감사입니다.

이 감사로 사는 것이 성경에 계시되어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지요.

정죄의 결과 : 하나님의 유기 (1:24-32)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Rom 1:24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온갖 성적인 범죄에 빠져 들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서로 육체를 더럽히고 죄에 물든 행위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Rom 1:25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고 일부러 거짓을 믿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피조물 앞에는 기도를 하면서 정작 그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께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 뿐이십니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Rom 1:26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모든 악한 일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자 심지어는 여자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자연스러운 법을 어기고 변태적인 성적 범죄를 저지르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Rom 1:27 남자도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동성끼리 더러운 욕정을 불태우며 수치스러운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대해서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이 됩니다.

즉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하나님의 진노가 보입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세상에 나타났다면 분명히 우리에게 그 진노가 보여 져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는 지역이나 개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진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경건치 않음과 불의함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노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는 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한 대로 인간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즉 인간 마음대로 살도록 방치 해버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26절에서도 '내버려 두셨으니'라고 말하고, 28절에서도 '내버려 두사'라고 말씀합니다.

내버려 두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몸을 서로 욕되게 하는 것이고(24),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고(25), 창조의 순리를 벗어나서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취하게 되고(26,27),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미움, 능욕, 교만, 자랑, 부모 거역(29-31) 등등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오직 자신의 욕심이 지향하는 바를 향해서 부지런히 움직여갑니다.

그 누구의 간섭도 싫어한 채 오직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내버려 두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7절 마지막에 보면 '.....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희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을 때 과연 인간들이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에 이끌린 대로, 욕심대로, 감정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에 대한 진노는 내어 버려두심이고, 내어 버려두심으로서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보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그대로 두셨을 때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보응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자기 욕심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이미 받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의 인생이 과연 하나님께 묻는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온 인생이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를 입고 사는 자와 은혜를 입지 않은 자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입지 않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항상 하나님이 간섭을 받습니다.

징계를 하시고 매를 때리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생을 주도해 가십니다.

이것은 내버려 두신 인생이 아닙니다.

원래의 내 모습은 내버림 받은 자로서 내 멋대로 살다가 멸망에 빠져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택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간섭하는 자기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만 복이고 은혜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를 내 마음대로 살지 않도록 하시고 더러움으로 나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은혜와 복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8 또한 그들이 5)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Rom 1:28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또 인정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악한 일을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Rom 1:29 그래서 인간의 생활은 온갖 악과 죄에 빠져서 탐욕과 미움, 질투, 살인, 분쟁, 거짓, 빈정거림, 험담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30 비방하는 자요 6)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Rom 1:30 그들은 비방을 일삼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난폭하고 거만하고 허풍을 떨고 언제나 새로운 방법으로 죄지을 생각을 하고 부모에게 계속 반항해 왔습니다.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Rom 1:31 그들은 일부러 사물을 곡해하고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동정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냉혹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Rom 1:32 그들은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죽음의 형벌로 다스린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길을 그대로 걸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28절에 보면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인간 마음대로 살게 되고, 마음대로 사는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들이 불의함이고, 추악이고, 탐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의 해결책은 '무엇을 하지 말아라'가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나온 불의와 추악과 탐욕 등이라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만 하면 불의함 추악 등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모습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29절 부터의 말씀은 인간의 죄를 항목 하나하나를 나열해서 드러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세상은, 즉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것은 불신자들의 모습이고, 신자인 저는 이런 모습들과 상관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채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했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것, 이것보다 큰 진노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내 멋대로 살면서 멸망을 향해 가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선택하셔서 간섭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도 좋으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간섭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소서'라는 고백을 하는 자가 되었다면...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성령의 역사하심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너희들은 모두가 악한 자다'라고 말할 때 '왜 우리가 다 악한 자냐 우리도 선한 일을 했다'라는 반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 우리는 죽어 마땅한 악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이 마귀로부터 지배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셔서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기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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