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 성경대학
•홈  >  케노시스 성경대학
  제  목 : 로마서 특강 2. 편지의 서두와 주제(롬 1:1-17) 김희중 목사(20210418) 조회수 : 366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1-04-28

20210418 로마서 특강2(롬 1:1-17) 김희중 목사

20210416 로마서 02

편지의 서두와 편지의 주제(1:1-17)

로마서 1장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난주에 공부한 서론의 몇 가지 내용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확인하고 1장의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1. 로마서의 특징

로마서는 교회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로 가기 위한 준비 서신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잘 짜여 진 신학논문과 같습니다.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바울이 정리한 기독교신학의 전반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기독교 역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경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기독교 제1세대 교인 가운데 유대교에서 복음을 재해석 해 낸 사람이 사도바울이며 유대교에서 기독교를 독립시킨 사람이 사도바울인데 이것이 로마서에 들어있습니다.

이 편지는 제3차 전도여행의 중심사역지인 에베소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형제를 돕기 위한 연보를 걷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기 위한 여행의 일정에서 마케도니아를 거쳐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에서 3개월가량 머무는 가운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서 많이 생각을 하고 심사숙고를 거쳐 쓰여 진 서신이었습니다.

2. 로마서 쓰여 지던 시기

로마서가 기록된 것은 주후 57-58년경으로 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바나바의 요청으로 안디옥 교회에 오기까지의 시간이 13년입니다. 바울은 이 13년이라는 시간동안은 율법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정리해 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의 1년의 사역과, 안디옥교회에서부터 출발한 1, 2, 3차의 선교 현장에서의 10여년의 시간은 유대교 율법에서 복음을 해석해 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바울의 나이도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활동한 연대를 보아서도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완숙의 경지에 이르는 시점에서 로마서가 기록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로마서의 내용(구조)

내용을 보면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서에서는 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를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이 문제를 1-8장까지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로마서 전체 분량의 절반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고 주제였던 거지요.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9-11장 까지 다루어지고 있고, 12-15장은 기독교 윤리를 다루고 있으며, 15:14절부터 16장은 편지의 결미와 인사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로마에 갈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미리 편지로 써 보냄으로 예습의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고, 바울이 자기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얻고, 복음의 핵심을 미리 적어 보냄으로 바울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며, 또 바울이 전할 복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혹시 바울이 결국 로마에 가지 못했을 경우를 생각하면서 자기는 못 가도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로마에 꼭 - 심어주고 싶었던 겁니다.

5. 편지를 가지고 간 전달자

고린도 옆에 있는 겐그레아 교회의 여 집사 뵈뵈라는 자매가 이 편지를 가지고 로마로 갑니다.

6. 바울의 사역 정리

로마서가 기록된 시기가 주후 57-58년으로 보는데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67년에 순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생애 중에 로마서를 기록하고 남은 시간은 10년 정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이후 사역자로서 준비하는 데는 약 13-14년 걸렸습니다.(아라비아 광야에서 3, 길리기아 다소에서 10, 안디옥교회에서 1)

그리고 1차 전도여행에 2, 2차 전도여행에 4, 3차 전도여행에 4, 이렇게 현장에서 부딪치며 10년의 전도자의 삶을 살았고, 고린도에 잠시 머물면서(3개월)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제 남은 삶이 한 10년 쯤 남았을 때였던 겁니다. 그런데 그 남은 10년 중에 약 5년 정도는 감옥살이 입니다. 고린도를 떠나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는데 예루살렘에 갔다가 결박되어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을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압송되어 로마로 가게 되는데 로마에 도착하여 가택연금 상태에서 2년간 또 옥살이를 하게 되고, 잠시 가택연금에서 놓였다가 마지막 체포되었을 때는 가택연금이 아니라 차가운 로마의 지하 감옥에서 순교하시기까지의 옥살이를 1년 쯤 하게 되니까, 감옥살이만 꼬박 5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5년은 오면서 가면서 길에서 보낸 세월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옥살이를 하면서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 이런 옥중서신도 기록했고, 목회서신이라고 말하는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런 일을 옥중에서 하신 겁니다.

[로마서 1]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Rom 1:1 [인사] 로마에 사시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께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이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전도자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도록 이 세상에 보내진 사람입니다.

바울서신은 그 당시 서신의 형식을 따라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편지를 시작하고 있는 거지요.

처음 시작하는 분위기는 서신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는 편지를 보내는 바울 자신을 이야기하는데 앞에서 말이 좀 깁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써 내려갈 때는 로마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보내는 편지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자신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 스스로를 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분과 활동내력을 보면 그는 상류층에서도 최상류층에 속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 태어났고 상류층의 가정을 배경으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한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선교하는 과정을 보면 그 사회의 완전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살고 밑바닥의 일들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가말리엘은 유명한 율법학자 힐렐의 손자이자 당시에 가장 뛰어난 율법학자였다.) 수학한 명문학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디아스포라 출신이면서도 히브리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가문은 베냐민 지파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종(노예)의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불러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의식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고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기의식 즉 자화상입니다.

바울을 이해하려면 이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Rom 1:2 이 복음은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 약속하신 것으로

그러니까 이 복된 소식은 갑자기 누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했던 것이라는 거지요.

그의 아들 은 예수 그리스도죠?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1)혈통에서 나셨고

Rom 1:3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다윗의 자손이고, ,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Rom 1:4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지닌 그분의 능력 있는 아들이신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확정 되셨다.’ 그런데 그분이 누구냐?

바로 ‘ ....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는 우리 주님이시다. 그렇게 말합니다.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Rom 1:5 세상에서 가장 천한 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하신 그 위대한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로마서 1장의 제목을 믿어 순종케 하자, 혹은 믿어 순종케 하는 사역..’ 이렇게 제목을 잡아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전부 가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순종이 없으면 잘못된 거예요.

반드시 믿었다면 순종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물론 순종이 나의 의로운 행위로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믿어 순종케 한다...’

이방인 중에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을 믿어서 순종케 한다.’ 그런 말인데요.

우리가 하나님 믿는다 하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믿는 거죠?

성부와 성령과 성자 하나님을 믿어 순종케 하나니..

믿어 순종하는 믿음이 그게 믿음이에요. 그 믿음이 인정받을만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Rom 1:6 로마에 사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와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Rom 1:7 (6절과 같음)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또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은혜라고 하는 것은 카리스라는 헬라적 마인드이고, ‘평강이라는 것은 샬롬이라는 히브리적 인사입니다.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Rom 1:8 [감사기도]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어디를 가나 여러분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참 유명한 한 단어가 나오는데, “믿음이라는 이 단어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려고 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말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바로 믿음이라는 단어인데, 헬라어로는 피스티스라는 말입니다.

피스티스라는 말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히브리어인 이스라엘 나라 말에서 왔는데, 그 이스라엘 나라 말에서 이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믿음이라고 번역하기는 상당히 애매합니다.

에무나하는 이 말은 에무나혹은 아멘’ ‘아만하는 말이 전부 다 똑같이 나오는 말인데, 그것은 충성됨으로라고 번역해야 가장 정직한 번역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할 때, 우리가 자꾸 믿음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넣어가지고 번역하니까 그런 번역이 나온 것 같습니다.

아멘진실로라고 되어 있고, 그 헬라어의 아멘은 소리만 따온 번역입니다. 아멘은 세계 공용어이지요?

그것을 음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온 것인데, 에무나’ ‘아멘’ ‘아민’ ‘아만하는 게 전부 다 충성되다’ ‘신실하다’ ‘성실하다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이 단어를 무조건 믿음이라고 번역해 버리면 매우 이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뭘 믿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렇게 말 하는데, 그 하나님 믿는 게 어떻게 하는 거냐? 그렇게 물어 보면 또 잘 몰라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지요?

그럼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뭐 하는 거예요?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대답을 잘 못해요.

여러분, 하나님 믿는다면 여러분이 교회 다닌다는 것 갖고는 안 됩니다.

믿고 순종하는 데까지 가야 돼요. 우리가 믿으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 믿어서 순종을 안 하는 거죠.

그러니까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어 순종하는 것을 성경에는 충성되다고 번역합니다.

성실하다’ ‘신실하다’ ‘충성되다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맨 나중에 심판하실 때 착하고 믿음 있는 종아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그렇게 말씀하잖아요.

충성되지 않고, 신실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을 믿음이 좋다그렇게 말하면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면 우리는 행위가 배제되고, 행위는 아무 필요가 없고, 그저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믿음이라는 말 앞에 오직이라는 말을 보태 놓은 거예요.

그런데 제가 성경 66권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한 번도 없습니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Rom 1:17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인정해 줄 자로 만드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 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 2:4)

여기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렇게 말씀했는데 본래 원어에는 오직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오직이라고 된 말인 헬라어로 라는 헬라어인데, ‘그러나라고 번역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러나 의인은’ ’더욱 의인은‘ ’그리고 의인은이렇게 번역 해야지, 도저히 오직으로 번역할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루터도 오직 예수라는 솔라 피데라는 말을 해가지고 행위는 필요 없고 오직 믿음이라는 생각을 강조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들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어요.

오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Rom 1:9 내가 여러분을 위해 늘 기도드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아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섬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다 나누어 주시기를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Rom 1:10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을 만날 기회가 와서 순조로운 여행을 할 수 있기를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정말 로마에 가고 싶었는데, 잘 안 되었어요.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을 참 많이 원했는데요, 11,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Rom 1:11 내가 여러분을 이처럼 애타게 방문하고 싶어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북돋아 주어 여러분의 교회가 주님 안에서 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믿음을 북돋아 드리는 한편 나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힘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간에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나누어 주어이 때 쓰는 단어가 메타디돔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나누어 준다’ ‘함께 가진다그런 뜻인데요.

요즘은 그것을 영어에 있는 임파테이션(impartation)’이라는 말 임파트(impatr)’ 라 해 가지고 목사의 새끼손가락이라도 붙잡아야 은사를 받지, 목사에게 밉보이면 국물도 없다는 식으로 잘못 인식 되었어요.

여러분,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지 목사의 은사가 아닙니다. 목사가 나누어 주는 게 아녜요.

그런데 꼭 목사의 은사처럼 그렇게 만들어가지고 예수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무슨 목사교처럼 만들어가는 거예요. 이런 현상이 매우 위험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Rom 1:11 내가 여러분을 이처럼 애타게 방문하고 싶어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북돋아 주어 여러분의 교회가 주님 안에서 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믿음을 북돋아 드리는 한편 나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힘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간에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는 나름의 어떤 은사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왜 안 나타나느냐? 여러분이 헌신해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한국교회 교인들이 원하는 은사는 정상적이고, 아주 교회에 유익하고, 아주 인격적이고, 이런 은사는 은사로 생각을 안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면 어떤 은사를 은사라고 하느냐? 일단 신비해야 돼요. 그리고 희한해야 돼요. 신비하고 희한하고 이상하고 알 수 없어야 이게 은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은사가 뭐냐? 그게 방언의 은사라는 거지요.

아니면 멀쩡한 사람을 휙 - 하면 넘어지게 만드는 일이라든지.....

굳게 서 있는 것이 정상인데, 아니 어떻게 굳게 서 있는 것은 은사가 아니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해야 은사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 곳은 교인이라는 사람이 막 밀려 들어요.

여러분, 멀쩡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에요.

그리고 성령의 은사가 아니고도 얼마든지 넘어 갈 수 있어요.

지금 증산도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막 넘어뜨리는 것이 유행이라는 거예요.

또 지산 스님이라는 분이 보고서를 써 놨어요.

자기는 방언이 뭔지 모르는데, 자기 절에 와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너무 빨리 하다보니까 방언이 터져버렸다는 거예요.

그 문서를 제가 찾아서 확인해 보지는 못했는데 에스라 하우스의 노우호 목사님이 강의 중에 하신 말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은사 중에 분명히 방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이 아닌 것도 많습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섬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집단적으로 집단 엉터리 방언이 터진 일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6년 동안 한국교회 전체를 몸살을 앓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뭐냐 하면 이른바 다미선교회사건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부산에 권민아라는 사람과 서울의 하방익이라는 소년들이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고 하는데, 자기가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92년도 1028일 자정에 예수님이 오시는데...... 기성교회는 영이 죽어서 신랑이 오는 날짜를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교회를 질책하고 방언으로 말하고 또 통역을 하고 하는데, 거기에 10만 명 이상의 교인들이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10만 여 명이 전부 다 방언이 터지는 겁니다.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초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100% 방언이 터졌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몽땅 다 거짓말 방언이었습니다.

방언도 거짓말이었고, 통역도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유창하게 했는데 그것이 다 거짓말이었잖아요.

그래서 제가 목회를 하면서 그런 사례를 충분히 많이 봤기 때문에 지금 알파코스’ ‘신사도운동이라는 것들을 하면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러면서 방언이 터지면 그것이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데...... 여러분, 물론 성령의 은사로 방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 주시는 정상적인 방언을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헌신이 있습니다.

방언이 개인에게는 분명히 유익합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단 5분도 기도하지 못할 정도의 사람인데도 방언으로 기도하면 1시간이나 2시간 계속하여 기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하나도 마음에 열매를 맺히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방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한국교회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 뜻도 모르고, 하면서 막 신비주의 분위기로 몰고 가서 초신자, 불신자들이 오자마자 방언이 터지는 것은 귀신의 방언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12,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Rom 1:12 (11절과 같음)

그래서 사도바울도 로마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서 조금은 염려하며 우려하는 면도 있었고, 또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사도바울의 신앙노선에 대해서 여전히 일말의 어떤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서 진리 안에서 대화해 봄으로서 성령의 교통을 통해서 서로 안위함을 얻었으면 좋겠다, 또는 서로 안심되고 서로 위로되었으면 좋겠다, 피차 유익할 줄 믿는다. 이런 마음이죠?

13,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Rom 1:13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나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가려고 수없이 계획했지만 번번이 방해를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기 바랍니다. 나는 다른 이방인에게서 거둔 성과를 여러분이 사는 곳에서도 훌륭히 거둘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니까 로마로 가고 싶어 한 적이 많이 있었지만 길이 막혔다는 거죠.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Rom 1:14 나는 헬라인과 같이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나 야만인과 같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나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무거운 전도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은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기 위함이었고, 신령한 은사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알게 된 예수님을 서로 나누는 것이 사도로서 해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과 나누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은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하셔서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하신 그 결과로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 아느냐는 것이지요.

이러한 복음이 신자를 견고하게 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주님이 일하신 그 덕분에 생명이 주어진 기쁜 소식, 복음을 나눠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 하나로 믿음의 모든 문제가 종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흔들리고 약한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신령한 은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복음의 의미에 깊이 빠져 있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기쁨이 없고 견고함이 없이 수시로 흔들리는 믿음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견고한 믿음이란? 자기를 포기함으로서 시작됨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신자는 오직 주님이 하신 일만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를 포기할 수 있고, 자기가 포기되어진 이상 자신의 일 때문에 흔들리고 낙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눠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빚진 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3)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흔히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선교사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복음이 들어왔겠느냐.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음이 왕성하고 전국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모두가 선교사들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선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의 빚을 졌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부지런히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거의 모두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빚을 갚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복음의 빚을 졌다고 한다면 그 빚을 우리가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복음의 빚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빚이라면 당연히 생명의 빚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생명의 빚을 우리가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복음을 받았으니까 이제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믿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빚진 자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것은 뭔가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복음을 담을 그릇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름 받은 자의 할 일은 복음을 담아서 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은 나를 복음을 나눠주는 그릇으로 쓰시고자 함이다이것이 곧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누군가를 부르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고 그 복음을 나누도록 하십니까?

그 이유는 세상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국 바울은 '나 같은 자가 부름 받은 것은 내가 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빚진 자'란 말을 한 것입니다.

즉 내가 잘나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너희들 때문에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Rom 1:15 그러니 로마에 사는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복음 전하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는 것입니다.

왜요? 빚을 졌으니까... 그렇죠?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말을 결론 내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들 때문에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로마의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신자 되게 하신 것을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쳐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천국가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면 무엇 때문에 세상에 살려 놓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니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누군가 복음을 알고 하나님께 나와야 할 택한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고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우리 개인의 인생 때문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데 또 무슨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까?

결국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한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를 아는 복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나오도록 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을 앎으로 자신이 포기되어지는 복음을 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빚진 자로 신령한 은사를 나누기 위해 로마로 가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때가 언제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선교사가 들어온 날이 복음이 들어온 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참된 복음을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국 곳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으면 뭐합니까?

문제는 바울이 나누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 즉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종교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할 때 오늘 우리가 마음 깊이 살펴야 할 것은 '내가 참된 복음을 아느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복음을 아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면 그것은 나 말고 누군가 때문에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분을 통해서 복음이 나눠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복음을 나눈다는 것은 다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16절에 보면,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Rom 1:16 [믿음을 통한 구원]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리지 않고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소식이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초청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생각할 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식당에서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나 길가는 사람에게 전도지 내어 미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이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뭔가 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힘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끄럽다'는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죄인 된 인간의 본성적 감정입니다.

부끄러움이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비교했을 때 상대방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신에 대한 감정입니다.

즉 부끄러움은 경쟁과 비교의식에서 나타나는 감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인간과 인간의 비교에서 나타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깨끗하신 분입니다.

더러운 인간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낀 인간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벗은 것을 알고 한 행동은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린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하려는 것도 부끄럽지 않은 인간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윤리로 가리고 종교적인 행동으로 가리면서 부끄러움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화과 잎을 벗겨 버리고 손수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앞으로 인간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하나님이 가려주시겠다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결국 그 뜻이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의 모든 수치와 허물을 가려주는 것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복음으로 인해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수치와 허물이 가려진 의의 사람으로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입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겠습니까?

그 누구도 우리를 부끄럽게 할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사신다면 그 누구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 못한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고, 성경을 잘 모른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고, 전도 못했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고 계시는데 왜 사람을 의식하면서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집니까?

좋은 옷을 입은 자 앞에서 초라한 옷을 입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복음의 능력이 없이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나누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끄러움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는 결코 복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부끄러워하면서 복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허물을 가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담대하게 어디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복음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빚진 자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나누는 신자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의 행동만 의지하는 자에게 복음이 능력입니다.

자기 행동을 바라보지 말고 내 대신 피 흘리신 그분의 행동만 의지하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능력의 복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Rom 1:17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인정해 줄 자로 만드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 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 2:4)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왜 복음이 기쁜 소식인지 이해하고 계십니까? 가장 기본적이면서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쁘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느끼고 있느냐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깨닫는 가운데 자연히 알게 되는 기쁨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란 땅에 있는 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는 인간의 모든 를 부정하고 내려옵니다.

하나님은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 없는 세상에 가 있게 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앞에서는 인간의 어떤 행위도 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은 를 행할 수 없는 죽음의 존재다'라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아무나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항상 불가능에 대해 끊임없는 도전을 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토대로 해서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나타내 보이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이 너는 아무 것도 못한다.”라는 말에 수긍 할 리가 만무합니다.

분명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의가 우리를 살립니다.

그러나 복음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가 나타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말씀과 같이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는데 영생이 주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은 죽은 존재이고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자기포기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믿음이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인데 대답은 없다입니다.

인간에게는 애당초부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자질도 없고 믿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가 외부에서 주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믿음이 없는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것이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란 곧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21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하는 분은 예수님이고, 따라서 율법 외에 한 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예수님께서 믿음 없는 우리들에게 믿음을 나눠주셔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 바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예수님의 일이고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오셔도 내가 안 믿어주면 그만이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자기 믿음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가짜 믿음이고 그 가짜 믿음으로 믿는 예수는 가짜 예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놀라우신 은혜이고 사랑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믿음 없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믿음을 나눠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고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십자가 지신 것은 주님의 일이고 그것을 내가 믿겠다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결국 나도 뭔가 한 일이 있지 않느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까지 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감사합니다' 라고 할 때,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더 자신에게 접근이 되고 사실화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까지도 책임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 자들입니다.

즉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라면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 놀라운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내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것입니다.

자연히 자기 자랑도 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복음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눠주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스스로 예수님을 드러내고 증거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내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만 묵상하면서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은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의의 도구로 사는 것입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Rom 1:18 [인간의 타락한 모습]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밀쳐 내는 사악한 모든 인간에게 하늘에서 진노를 내리십니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Rom 1:19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요?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4)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Rom 1:20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인간들은 땅과 하늘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 그분이 어떠한 분이며 또 얼마나 위대하고 능력이 영원한 분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세계의 그 섬세함과, 그 웅장함과, 그 장엄함과, 그 다양함과, 그 정밀함... 이런 것을 지금 우리처럼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말할 때, 그러니까 예수님 이전 세계라든지 예수님 당시 그때는 분명히 일반과학으로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정밀한 피조세계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으로 보면 해와 달과 지구가 똑 같은 것처럼 보여요.

일식이나 월식 때에 포개어지면 그림자를 보면 세 개가 똑 같아요.

그런데 태양은 우리 지구보다 자그마치 100만 배입니다. 태양에 구멍을 뚫고 지구를 집어넣으면 지구가 100만개나 들어갑니다.

거리를 적당하게 조절해 가지고 크기가 똑같아 보이게 그런 정밀함이라든지, 세포 세계의 정밀함이라든지, 여러분 인체에 있는 혈관을 모세혈관까지 한 선으로 이어 붙이면 10km의 길이라는 거예요.

그 길이는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돌아가는 길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정밀한 세계를 옛사람들은 알지 못했어요. 그래도 핑계를 못한다는 거예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온 지구상에 있는 인류의 온 지성을 다 모은 것 보다 더 높은 지성을 가진 어떤 분이 지적으로 디자인 하셨고 설계하셨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 못합니다.

결코 존재 자체가 우연일 수 없다는 거지요.

질서나 법칙이라는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지성의 산물이라는 거지요.

모든 것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이 없어요.

최소한도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거기서부터 찾으면 타락한 인간 지성으로는 찾지 못하지만, 성경을 보고 배우면 눈이 번쩍 해야 돼요.

20,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4)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Rom 1:20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인간들은 땅과 하늘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 그분이 어떠한 분이며 또 얼마나 위대하고 능력이 영원한 분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핑계 못합니다.

문제는, 21절이 핵심이죠.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Rom 1:21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 커녕 날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시는데도 감사조차 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또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리석은 생각마저 품고, 그 어리석은 생각에 아둔해져 분별력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자기는 항상 무심하면서 그냥 조금만 제 소원대로 안 되면 하늘도 무심하다고... 원망을 하지 말든지...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미련한데 또 어두워져 봐요. 그러니까 멍청하고 미련한데 또 캄캄해져 봐요.

그래가지고는 어떻게 하느냐?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Rom 1:22 하나님 없이도 현명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와는 반대로 완전히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멍청하게 되어가지고,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Rom 1:23 그들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대신에 나무나 돌로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형상을 본뜬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동지역에 가면 똥파리를 신으로 섬기는 나라가 있어요. 그것이 바알세붑이라고 파리의 신이예요.

여러분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 그 책에 보면 똥파리 신에게 기도하는 기도문이 나오죠.

윙윙거리는 나의 신이시여. 하면서 똥파리에게 기도하는...

그렇게 인간이 똑똑한 것 같은데, 멍청하다는 거예요.

김용옥 교수를 보면서 그분은 참 똑똑한 것 같은데...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성경을 말할 때는 제가 보기에는

멍청한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가 하는 말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헷갈리게 하시는 분이다.’ 라고 하던데 맡는 말입니다.

똑똑해도 겸손해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금 똑똑한데 교만에 뒤집어쓰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거지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니다.

믿어 순종케 하는 사역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믿고 사랑하는 데까지 가야 돼요. 믿고 사랑하면 사랑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여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전체댓글 0

댓글 쓰기0/200
입력
  이전글 : 로마서특강1(행 19-20장) 김희중 목사(20210409)
  다음글 : 로마서 특강3, 하나님의 의의 계시(롬 1:18-39) 김희중 목사(20210423)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