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을 함께 연구하고 공유하는 케노시스 아카데미 입니다.
"
제 목 : 세계관 전쟁- chapter10-세상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라(유영만 장로님) | 조회수 : 825 |
작성자 : 최성자 | 작성일 : 2019-01-30 |
첨부파일: 성경아카데미 20180624-유영만장로.hwp(27K) |
성경아카데미 20180624-유영만
■ 세계관 전쟁-이태희/ chapter10-세상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라
□ 내용요약
-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이태희 목사님의 ≪세계관전쟁 : 동성애가 바꿔 버릴 세상≫을 읽고 지금까지 외면하고 싶고 뭐라고 말할수 없었던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과 그리스도인의 자세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상에서 거룩한 영향력 나타내야하는 그리스도인의 되어야 한다.
이세상의 보이는 문명은 세계관-생각의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상 개인적인생각입니다.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문명과 문화가 만들어진다.
성경적세계관으로 살아가고 성경적 관점을 우리 삶속에서 뿌리 깊게 내릴 수 있는가는 그리스도인모두에게 구해야할 당연한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 이니라.(마7:7~8)
우리 안에 갈망하는 것들은 사회적 성공, 부, 명예가 아니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해본적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가부터 구해야한다. 제가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십시오.
사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때까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답답했다.
그것은 우리가 회심을 넘어 충돌(Impack)하기를 결정해야 한다,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레즈비언임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일대일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만남으로서 하나님이 자기의 삶에 부딪쳐 오신과정에서 회심 할 수 있었고 그 순간에 경험한 충동들은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은 삶의 전반적인 체계와 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자기가 가지고 살아왔던 가치관, 세계관, 삶의 방식과 습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롭고 생소한 세계관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종교적인 신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체계요, 우주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총체적인 진리관 임을 알게 되었다. 부활하심을 믿음으로서 그분이 사람이 아니라 신이시다 스스로 생명을 버렸다가 다시 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시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다. 자신의 가치 체계를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한다. 그것이 싫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기지 않는 것 보다도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기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삶의 방식을 따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자리아 박사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세계관의 충돌’로 표현한 것은 매우정확하다.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은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은 구원론이 아니라 우주론, 즉 온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이라고 말했다. 즉 기독교의 진리란 개인의 구원문제만을 다루는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의 영적, 물리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를 다스리고 있는 총체적 삶의 체계 또는 우주 보편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진리가 ‘영향력’있는 삶으로 변화시켜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는 선포해야한다. 그분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혼돈가운데 질서를 창조하시며 죽음가운데 생명을 창조하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한다. 선포하지 않으면 장롱속에 갇혀 있는것처럼 교회안에 갖혀 있어서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선포한 말씀대로 살아 내야한다. 입을 통해 진리가 삶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
말씀하신 하나님이 육신의 옷을 입고 땅에 오셨듯이,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속에서 성육신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우리의 사명이요, 이와 같은 삶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로부터 자유해지고, 가정이 가정폭력과 이혼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 질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분열된 정신세계가 기독교세계관안에서 통합되어야한다. 즉 교회와 세상이라는, 서로 다른 진리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서로 다른 기준이 다스리는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분열적인세계관을 기독교세계관으로 통합해야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토대로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 입으로 선포되는 진리가 세상가운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
-기독교적 시민교양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방식대로 선포 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교양있는 태도에 강렬한 신념을 결합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신념과 수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가치관이 동등한 것처럼 대우 받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기독교 신앙과 양립 할 수 없는 관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와 가치의 문제에 대해 판단력을 사용하라고 권고한다.
사도바울은 친절과 인내와 온유함을 계발하라고 권면하면서도 성적부도덕과 더러움과 술 취함과 같은 육체의 일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라고 주장한다(갈5:16~23)
타인의 하는 모든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포용하는 상대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회복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그들로 하여금 죄를 떠나 진리 가운데 거하도록 힘쓰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다.
둘째, 기족교적 시민교양은 교양을 갖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분노에 찬 언어는 건전하고 생산적인 토론을 방해 할 뿐 아니라.그리스도의 이름과 교회에 큰상처를 남긴다.
셋째, 기독교적 시민교양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을 갖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시간의 ‘지성소’를 확보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의 격렬한 싸움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갖고 임하기가 힘들어 진다.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때로 감정이 격앙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마음과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독교적 시민교양을 갖고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할 수가 있다.
넷째, 상대방의 관점을 갖는 것-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 12
기독교적 시민 교양의 핵심은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나도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심리적, 감정적 공감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감정이입‘의 훈련이다.
자기중심적인 굴레를 깨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관점을 갖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수가 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이다. 아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죄인의 모양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켜 가기위해 갖취야할 기독교적 시민 교양의 표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리라 히4:15
- 기독교적 성 윤리를 회복하는 방법
성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근본적으로 혼동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될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시민교양을 가지고 그와 같은 사명에 앞장서야 한다.
첫째, 성적으로 자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라.
우리 모두는 자신의 성에 대해 정직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우리가운데 자신을 성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모델로 내세울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7
둘째, 동성애자와 동성애자를 구분 할 줄 알아야 한다.
죄를 포용하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사랑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고민해야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보실 때 언제나 죄와 죄인을 분리해서 보셨다. 창녀, 세리, 귀신들린 사람을 보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최악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그분의 자녀다. 음란이라는, 탐욕이라는 이물질이 그를 장악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의도하지 않은 그 무엇이 그를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치유는 이질적인 것을 제거하는 일이다. 본모습과 이질적인 요소를 갈라내고 제거하는 수술이다. 예수님은 병자와 죄인을 그렇게 고쳐 주셨다.
셋째,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 12:2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마음이 새롭게 되어 전인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의 거짓, 탐욕, 교만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유감스럽게 생각해야한다. 동성애에 대해 비판적인만큼 과연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가? 심각하게 여기로 있는가? 그만한 열심을 내고 있는가? 삶의 전반에서 거룩이 회복되어야 한다.
넷째, 성도들이 편안한 사람이 되어 주는 것, 즉 목회적인 접근이 필요 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우선 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첫째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7~39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음란을 사랑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불의를, 부정을, 탐욕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음란과 탐욕을 혐오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거짓과 불의에 분노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죄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죄에 대한 분노는 죄인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동성애자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동성애를 그토록 혐오하시는 이유이다. 동성애가 아름다운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에게 필요한 자유는 ‘동성애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동성애로부터 자유’다. 즉 죄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이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권세를 힘입어 모든 음란과 탐욕, 거짓과 불의의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주어짐을 믿는다.
■ 그리스도인이 취해야할 6가지 무기
존 스토트 박사는 ≪살아있는교회≫에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위해야할 6가지 무기를 조개하며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 시민 교양을 가지고 이 무기들을 취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스도인인의 무기1. 기도
하나님의 진리를 기독교적 시민 교양에 담아 이세상속으로 들어가 선포하고 유통시킬 때는 반드시 기도하는 삶 가운데서 그와 같은 사명들을 감당해야 한다. 기도야 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무기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월요평화기도회는 독일통일과정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기적의 도화선이 되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평화적으로 극복되며 무기를 사용하지않고 통일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겨자씨 한 날갱이 만큼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안에서 산을 옮길만한 폭발력을 갖는다. 세계관이 가장치열하게 펼쳐지는 교육현장을 위해, 교회주일학교를 위해 기도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인의 무기2.복음전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1:16
복음 안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복음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변화된 사람들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이점에서 우리는 복음전도가 사회적 행동보다 더 우선 되어야 한다고 선포할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적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의 무기3. 모범적인 삶의 모습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많은 소금, 많은 빛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타협하지 않은 그리스도 한분이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보이셨는지 기억하라.
의를 위하여 타협하지 않고 용기 있게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서있는 한 사람을 바라볼 때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길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한사람의 모범은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에게 전염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하나가 하나님의 진리대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때 주변의 많은 이웃에게 선한 영행력을 행사할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4. 논쟁
우리가 살아가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데 있어 피해야할 두 종류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강요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나머지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게시된 진리를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법률로 강제하거나 힘으로 그뜻을 이루려고 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애시당초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순종DNA’ 대신 순종할수도 있고 순종할수도 있는 ‘자유의지’라는 DNA를 넣어 주셨다. 창조주 하나님도 우리에게 선을 강요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피해야 할 또하나의 모습은 자유방임이다. 강요의 반대는 자유방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조차 사람들을 비기독교적 방식에 내버려두고 가섭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려 애쓰지 않겠다는 자유방임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떤 아이가 죽음의 길인지 모르고 벼랑끝을 달려가고 있다면, 그 아이의 “달려갈수 있는 권리”를 그대로 방치해 두겠는가? 하남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계시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런 입장을 취할수 없다.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방관이다. 진리를 알고 있는 자들이 진리를 모르는 자들을 방관하는 것은 죄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적절한 태도는 무엇일까? 바로 논쟁을 통한 설득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위해야할 방식이요 무기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도들과 같이 성경을 인용하고 철학을 이용하고 세상학문등을 이용하해서 이성적으로 논쟁하면서 복음을 권하고 설들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자유를 억압하려는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다.
내가 오늘 내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것이 아니냐 신10: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되어지는 아닌 인류보편적인 진리임을 획신을 가지고 말해야한다. 세상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계시된 ㅣ기독교적 윤리를 따르는 것이 살길임을 명확하게 알수 있도록 논쟁을 통해 설득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시고 일대일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셨다.그래서 그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우쳐 주셨다.바리새인들은 늘 백전백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바울사도도 마찬가지다. 틈만 나면 논쟁했다. 그는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설득하고자 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무기는 논쟁을 통해서 설득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이중 언어를 개발해야한다. 세상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 할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성경적 진리를 세상언어로 번역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한다. 성경적 언어, 믿음의 언어, 영적인 언어를 세상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끊임없이 번역하고 바꾸어 나가는 작업을 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의 무기5. 행동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전도하고, 예배하는 영적인 행동도 매우 중요하지만 사회적 행동에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무기5. 고난
고난은 진정성에 대한 하나의 시험이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희생이 따르는 행위다.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도덕적 기준들은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세상의 공격과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손양원목사님의 고난과 고초를 당하면서 순교하기까지 “나 외에는 다른신이 없다“ 이말씀 한구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자신의 생명을 던져버렸기 때문이다.이와같이 믿음의 순종이 세상을 바꾼다.
사도바울은 끊임없이 공격과 박해를 받았지만, 그럴수록 더 강력하게, 더 영향력 있게 하나님의 진리를 변호했다. 그의 안에 주체할 수 없는 확신과 기쁨, 평안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디. 하나님의 진리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공격을 받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더 강력하게 성장할 것이다. 반면에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진리를 타협하거나 안전을 추구하는 교회는 반드시 점진적으로 쇠퇴하게 되어 있다.
-세계관의 전쟁의 승리는 확정되었다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온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속에서 사탄의 통치가 떠나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깨어진 가정 가운데 역사하고 있던 사탄의 통치가 떠나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폭력과 음란으로 얼룩진 학교에서 역사하고 있는 사탄의 통치가 떠나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학교안에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부패와 거짓으로 얼룩진 정치안에 사탄의 통치가 떠나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의미하는 바다.
한국교회의 위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한다. 그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2013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 의하면 한국교회신뢰도 여론조사결과 신뢰한다는 응답비율은 19.4%에 불과한 바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44.6%나 되었다. 한국기독교의 정체 혹은 쇠퇴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볼수 있다. 이것은 사실 교회 자체의 위기일 뿐 아니라 가정의 위기, 학교의 위기, 정치오 경제의 위기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위기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위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세상의 ”소금 과 빛“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부패해갈 때 사회를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대로 방치하면 그대로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인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다.
거룩한 두려움만이 세상을 바꿀수 있다
존 비비어가 쓴 ‘무엇이 선인가?’에 교도소에 수감된 어느 유명한 부흥사 이야기가 나온다. 유명부흥사가 어쩌다 그렇게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
존비비어가 물었다, “당신은 어느 시점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 버렸나요?어쩌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잃고 죄를 짓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적 없어요”
“존, 나는 죄를 저지르는 동안에도 늘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그분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매 주일 빠짐없이 예배를 드리고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기면서도 세상에서 사기를 치고 음란물에 빠져 살수 있었던 이유, 간통죄를 저지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수 있었던 이유, 이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윗이 그랬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어오자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망각했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삼하12:9
오늘날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외도를 하고 사기를 치며 폭력과 탐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도 정작 성경을 따라 가지는 않고,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악을 떠나지 못한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를 조롱하고 말씀을 하찮게 여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한 탓이다. 그리스도인이 거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란 두려움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 소금 맛을 낼 수가 있다, 거룩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교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세상과 맞서라
동성에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동성애가 담고 있는 인본주의 세계관 때문이다.
인본주의 문화와 싸워야한다. 진짜 전쟁은 기독교 세계관과 이에 대항하고 있는 여러 가지 세속적세계관 사이의 우주적인 갈등이다. 오늘날 세계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고, 또 이세상이 창조주의 지혜에 반영 할 수 있도록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 해야 한다.
이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을 닮은 존재들이 사는 세상, 그리스도가 오셨고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를 보내시는 그 세상속으로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교회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승리는 확정된 것이다. 담대하게 전쟁에 임하라.
세상은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증거하고 섬기며,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고 죽어야 하는곳이다. 우리 모두 세상속으로 들어가자. 그리고 사명을 감당하자.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니시라 마28:18~20
"
전체댓글 0
이전글 : Chapter5문화전쟁(세계관이 문화를 바꾼다) - 최성자- | |
다음글 : 문화전쟁2 (동성애에 대해 침묵하는 이유) - 장미옥 권사님(2018.06.10)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