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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국의 선교사 이야기(1) 조회수 : 2094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1-10-16

 

한국의 선교사 이야기(1)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사는 법이 나오고 믿음으로 죽는 법이 나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조선을 사랑하여 희생의 삶을 사신 초대 한국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살펴봅니다. “세계 선교 공동체선교사님과 간사님들의 삶이 한 알의 밀알의 삶이되어지기를 바라면서한국의 선교사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과 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7번 출구 정면에 양화정 정자와 마포구 재활용센터 간판이 보입니다. 그 사잇길로 200여 미터 걸어오시면 묘원 입구입니다.

양화진이라는 곳에는 미국인 2 30, 영국 30, 프랑스 25, 덴마크 3, 호주 12, 벨기에 4, 백러시아 54, 캐나다 7, 일본 1, 스페인 4, 한국 17 …… 국적을 달리한 묘소가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 깜깜했던 100년 전, 배를 타고 몇 개월씩 고생을 해야 동서양이 간신히 이어지던 백 년 전, 나라를 등지고 고향을 버리고 가족과 헤어져 이 미개하고 몰이해로 가득 찬조선 땅으로 들어왔던 선교사들 ……전도자들 …… 그 분들은 정말 성령을 힘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백 년 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분들…….’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 땅에 묻힌 하나님의 사람들 ……. 여기 한국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선교사를 먼저 소개합니다.

 

John W. Heron 선교사

1858 6 15일생 1872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올 때 존이 14세 때 이었습니다.

존 헤론이 한국의 선교사가 되려고 작정했을 때 어떤 장벽이 있었는가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존의 친구

존이 한국의 선교사가 되려고 작정했을 때, 오래 전부터 의사의 길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고 같은 길을 걸어온 그의 친구는 실망과 배신감까지 나타내며 존의 뜻을 돌이키려고 한동안 고심했습니다.

2. 존의 학교

테네시 주 매리 빌 대학 졸업, 테네시 종합대학 의과대학 개교 이래 최우수성적의 영예를 안고 졸업했습니다. 이민 11년 만에 1883 25세의 아들이 의과대학을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자 목사인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교인 테네시 종합대학에서 후배 양성(의사)을 위해 교수사역을 해 줄 것을 끈질기게 제안 해 왔지만 거부하고 한국의 선교사가 되려했습니다. (교수사역은 안정된 길, 장래가 보장되고 튼튼하게 다져진 길. 의미도 있고, 보람도 찾을 만한 일 이었는데도 그는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

3. 존의 아내 해티

해티는 존스보로 의과대학 교수의 딸이었습니다. 존의 선교사의 길을 듣고 말했습니다.

“코리아가 나라이름이에요.? 존의 앞길은 열려 있어요!! 존은 그 놀라운 실력을 이 넓은 나라, 이 많은 인구를 위해 쓰여 져야 해요. 존은 더 많은 사람, 더 큰일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아무리 설득하려해도 존의 뜻을 도리 킬 수 없었습니다.

해티의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반면 존의기도도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여인을 나의 아내로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마음을 열어 주시 옵소서, 그리고 코리아를 사랑하게 해 주시고 그녀가 저와 함께 한국으로 가게 해 주세요해티가 결심하기를 존의 선교사역의 길을 본격적으로 방해 하고자 했습니다. 해티는 반대 이유를 연구했습니다. 코리아는 위험하고, 미개하고, 더럽기 짝이 없고, 가난하고, 굶어 죽는 일이 태반이며, 일본이 노리고 있고, 중국도 계속 손을 뻗치고 있고, 러시아도 한몫 보겠다고 하고, 왕실의 권력다툼은 치열하게 벌어진 상태인데 어떻게 선교사로 가려는가? 포기하라고 강권했습니다.(다음 주에도 계속)

 

                           이천 십일 년 시월 십육일

                              담임목사 손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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