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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쇳물 식은 자리에 뼛조각들…‘눈물의 입관식’ 조회수 : 1458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0-09-12

쇳물 식은 자리에 뼛조각들…‘눈물의 입관식

 

손이 닿자마자 바스러졌다. 10일 오전 10, 펄펄 끓던 쇳물이 식은 자리에서 발견된 김아무개(29)씨의 다리뼈와 두개골뼈는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 안에서 다 타버리지 않고 남은 것만도 기적에 가까웠다. 당진경찰서 과학수사팀 소속 경찰관이 산화된 유골을 조심스레 자루에 담았다.

뼛조각을 보고 유족들이 오열했다. 김씨의 부모와 세 누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아들, 동생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서도 주검조차 볼 수 없어 가슴이 무너지던 나흘이었다. 유족들은 그 나흘 동안 발인 날짜도 장지도 정하지 못한 채 장례식장을 눈물로 지켜왔다.

장례식장에 외롭게 비어 있던 나무관이 공장으로 들어왔다. 관에 하얀 창호지를 깔고 바스러져 가는 뼛조각을 넣었다. 숨진 김씨는 이제야 누울 곳을 얻었다. 지난 7일 새벽 150분께 충남 당진군의 환영철강 제강공장에서 일하다 쇳물에 떨어져 숨진 김씨의 입관식은 이렇게 진행됐다.

한 누리꾼이 김씨의 사고 소식을 듣고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추모시를 인터넷에 올렸고, 추모시가 빠르게 퍼지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사고 현장인 전기로에 더는 쇳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청년을 집어삼켰던 시뻘건 쇳물은 나흘을 내리 식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허연 재처럼 철가루만 남았다. 그래도 남은 열이 뜨거워, 기자가 신은 장화 바닥이 조금씩 녹아들 정도였다. 섭씨 1600도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열기였을 터다.

김씨는 지난해 6월 회사에 입사한 새내기였다. 당진에서 태어나 2년제 대학 자동차학과를 졸업한 뒤 조그만 광고회사에 다니며 간판을 만들었다. 그러다 안정된 직장을 찾아 이 회사에 지원했다. 회사 관계자는당시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지만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 이 동네로 이사까지 했다는 말에 열정이 느껴져 뽑았다고 말했다. 1년여를 일하며 안정을 찾은 그는 여자친구와 내년쯤 결혼할 꿈을 꾸고 있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7일 새벽, 그는 여느 때처럼 작업복 차림으로 전기로 주변에서 일하고 있었다. 4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에서 그는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근무하는 조였다. 한 조에 6명씩, 고철을 전기로에 넣어 녹여낸 뒤 쇳물을 다음 공정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이 회사에선 하루에 100t 분량의 고철을 7~8번 녹여내고, 또 하루에 세 번씩 20분 정도스프레이 보수작업이라는 정리 작업도 진행한다.

이날 새벽 120분께, 고철을 새로 전기로에 넣기에 앞서스프레이 보수작업이 시작됐고, 김씨는 전기로 주변 청소를 맡았다. ‘스프레이 보수작업을 할 때면 전기로의 둥근 뚜껑이 열린다. 당시 전기로에는 쇳물 15t 정도가 남아 있었다. 새벽 140, 김씨의 동료는 김씨가 전기로 입구 옆에 걸쳐 있는 철근 조각을 치우려고 파이프를 들고 애쓰는 모습을 봤다. 그다음으로 본 게 김씨가 쇳물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기로는 당분간 가동되지 않을 예정이다. 경찰은쇳물은 비중이 커서 사람이 빠지면 무조건 위에 뜨기 때문에 주검과 관련이 있는 곳은 전체 쇳가루의 윗부분뿐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동료를 잃은 슬픔에 빠진 회사는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조시 제목대로 남은 15t의 쇳가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 환영철강 이광선 관리팀장은

“조만간 회사에서 돌아가신 분을 위한 진혼제를 열어 넋을 위로하고 큰 슬픔에 빠진 동료들을 위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일터에서 사고성 재해로 목숨을 잃은 이는 1401명이다. 이들 중에서 30살 미만은 113명에 달한다. 아까운 청춘이 스러져간 현장에는 온종일 차가운 비가 내렸다.

                 (한겨레 당진/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제공)

 

                        이천 십년 구월 십이일

                           담임목사 손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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