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 말씀묵상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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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케노시스 목요성경대학] 가증한 행위, 그리고 나와 같은 선지자 / 도피성과 이웃 조회수 : 593
  성경본문 : 신명기 18장~19장 설교일 : 2020-06-25
  설교자 : 김희중 목사
  첨부파일:   신명기강의 22 (20200625) 가증한 행위 그리고 나와 같은 선지자.hwp(80K)

신명기강의 22 (20200625) 가증한 행위 그리고 나와 같은 선지자

(읽을 과제물)

가증한 행위 그리고 나와 같은 선지자

(신명기 18)

용납할 수 없는 가증한 행위(18:1-13)

1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Deu 18:1 [제사장들의 생활대책] 제사장 지파로 구별된 레위 지파에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나누어 주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제사장들은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 가운데에서 자기들의 몫을 받아먹고 살게 하십시오.

2 그들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기업을 가지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으니라

Deu 18:2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주께서 친히 그들의 몫이 되시어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동족들과 같이 땅을 나누어 줄 필요가 없습니다.

3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몫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Deu 18:3 소든 양이든 누가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면 제사장은 그 제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제물의 앞다리 하나와 두 턱과 위를 자기 급료로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4 또 네가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네가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

Deu 18:4 또 여러분은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과 처음 깎은 양털도 제사장들에게 주십시오.

5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Deu 18:5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가운데에서 레위 지파를 선택하여 그들이 자손 대대로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6 이스라엘 온 땅 어떤 성읍에든지 거주하는 레위인이 간절한 소원이 있어 그가 사는 곳을 떠날지라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이르면

Deu 18:6 온 이스라엘의 성읍들 가운데에 흩어져 살던 레위 사람들도 원하기만 한다면 여호와께서 지정하실 그 성소로 찾아가서

7 여호와 앞에 선 그의 모든 형제 레위인과 같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길 수 있나니

Deu 18:7 이미 그 성소에서 제사장으로 봉직하는 자기의 형제인 레위 사람들과 똑같이 제사장의 직책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8 그 사람의 몫은 그들과 같을 것이요 그가 조상의 것을 판 것은 별도의 소유이니라

Deu 18:8 그들도 성소에 있는 제사장들과 똑같이 제물의 몫을 나누어 받을 권리가 있고 그 밖에 자기의 재산을 판 돈도 그대로 가질 수 있습니다.

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Deu 18:9 [우상숭배와 복술의 금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실 땅에 들어가거든 그곳 백성에게서 우상을 숭배하는 더러운 풍속을 본받지 마십시오.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Deu 18:10 여러분은 아들이나 딸을 산 채로 불살라 우상의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는 어느 누구도 점쟁이나 시대의 징조를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자나 뱀을 가지고 마술을 부리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Deu 18:11 주문을 외는 자나 혼백에게 물어 보는 자나 초혼자나 죽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Deu 18:12 이런 짓을 하는 자는 누구든지 여호와께서 미워하십니다. 그 땅에 사는 백성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여러분 앞에서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Deu 18: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해야 합니다.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Deu 18:14 [예언자를 보내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쫓아낼 그 백성은 점쟁이들이나 시대의 징조를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이들의 말을 듣고 살지만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이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점쟁이(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9)라고 말씀합니다. 본받지 말라는 가증한 행위란 앞서 말씀드린 그런 자들을 가까이 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지금은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하면서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고 점을 치는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무당을 물러서 굿도 하지 않고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점을 치지도 않았다'라고 해서 나 자신은 오늘 본문 앞에서는 깨끗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 말한 그들이 하는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0절에 보면 아들과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기 자식을 불에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이방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성행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10절의 말과 오늘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식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식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십일조가 자식의 역할을 하고 있고, 우리의 봉사가 자식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점쟁이(복술자) 점을 치면서 인간의 복을 예언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것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인간을 화를 피하고 복으로 유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이렇게 하면 화를 피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점쟁이와 똑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오늘날의 교회가 점쟁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는 대신 교회 와서 점쟁이를 찾고 있는 것에 자나지 않습니다.

길흉을 말하는 자란 날자와 시간을 따지면서 미래의 길흉에 대해서 미리 말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사할 때 소위 손없는 날을 택한 것이나 결혼 날짜를 따지는 것들을 말합니다.

요술하는 자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을 뜻하고, 무당 역시 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으로 화를 물리치고 복을 끌어들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언자란 신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계시를 통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계시 운운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하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떠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접자란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귀신을 불러내어서 귀신으로부터 미래의 길흉을 미리 듣고 그것은 말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박수는 남자 무당을 가리킵니다.

초혼자란 죽은 귀신의 영을 마음대로 초청할 수 있다는 사람입니다. 죽은 영을 불러내어서 그 힘으로 앞으로의 일을 미리 예언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서 그들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용납하지 말라는 말로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 앞에서 쉽게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난 아니야'라는 당당한 마음으로 앉아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무당 등 이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들이 무엇이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화는 피하고 복은 끌어들이자는 속셈에서 점쟁이를 찾고 길흉을 말하는 자를 찾고 점쟁이를 찾고 무당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화와 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을 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탐욕 때문입니다. 세상을 모든 기대를 걸고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은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일이 잘 안될 때는 점치는 자를 찾아서 화에서 벗어나서 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물어보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인정하신다면 과연 그러한 본질적인 욕망이 교회에서 보여지지 않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은 1-8절까지 말씀하고 있는 '레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레위인은 특별한 족속입니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 세상 기업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족속들입니다. 세상 것을 힘으로 생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족속이 레위인 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일해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을 가지고 먹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관심 속에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다면 자연히 레위인도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삶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도구로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레위인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앙으로 바로 산다면 레위인 되신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이고, 신앙으로 바로 살지 못한다면 자연히 예수님께도 관심이 없어질 것이고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 당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추구하는 것은 복이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 없이 복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찾는 무당 집단이 되고 말 것이 자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헛됩니다. 헛된 세상에서 헛된 것을 붙들기 위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시고 헛되지 않은 예수님만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 때 헛되지 않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2. 선지자를 일으키실 약속(18:15-22)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Deu 18:15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의 동족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한 사람을 예언자로 불러 세워 내가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예언자의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Deu 18:16 호렙산 기슭에 모였을 때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다시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가 다시는 그 큰불을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 하고 내게 호소하지 않았습니까 ?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Deu 18:17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렇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Deu 18:18 내가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세우고 그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겠다. 곧 내가 예언자들에게 명령하면 그들이 내 백성에게 그대로 전할 것이다.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Deu 18:19 그러나 예언자가 나를 대신해서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직접 그에게 책임 추궁을 하겠다.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Deu 18:20 또 어떤 예언자든 내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내 이름을 내세우며 교만하게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을 내세우며 말한다면 예언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21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Deu 18:21 또 한편 여러분에게는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Deu 18:22 여호와의 이름을 내세우며 말하는 예언자가 있다해도 그의 말이 맞지도 않고 이루어지지도 않으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시키지 않은 말입니다. 그 예언자가 제멋대로 교만하게 말한 것이니 여러분은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당, 점쟁이, 점치는 자 등을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상상하고 연구한 방법을 가지고 신을 섬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가 바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를 통해서입니다.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선지자가 없기 때문에 세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당시에는 모세가 선지자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모세 역시 완벽한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16절의 말씀과 출애굽기의 말씀을 연결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호렙산에서 여호와께 선지자를 구했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20:18-19절에 보면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의 말씀을 들을 때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봅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떨면서 모세에게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말하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아닌 다른 선지자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 더러 '당신이 말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요청대로 지금모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일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종합해 보면 결국 어떤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설 선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7,18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에 두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시고자하는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겠다고 합니다. 모세와 같다는 것은 모세가 하는 일,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세우시겠다는 것이고, 하나를 세우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하는 참된 선지자는 오직 한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장차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고, 구약에 나타난 다른 선지자들 역시 장차 나타날 한분 선지자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요구한 것은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듣지 않고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대신 말씀을 전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깨달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때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결코 대신 말씀을 전할 사람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중보자를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심으로 중보자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죽어야 할 인간임을 아는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중보자를 바라보고 진심으로 중보자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교인들을 다그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말씀은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함과 자기 사랑만 잔뜩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 아닌 말씀 속에서 과연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 과연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겠습니까? 주님만이 나를 살린다는 간절함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가나안 민족과 같이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찾는 거짓된 신앙일 뿐입니다. 교회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반대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반대할 때는 말씀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까지 함께 반대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로 거부 받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계까지 위협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사람들이 거부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을 말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결국 다른 복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볼 때 어느 한사람도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전하여 준 말씀만 그대로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사람들의 반대를 받고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말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하나님의 뜻이 너무 광범위해서 그 뜻은 다 알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밖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법을 준수하고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피에 모든 기대를 거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보자를 내세워서 대신 전하게 하는 것은 죄인 된 인간이 말씀을 직접 듣게 되면 죽어야 하기 때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입니다.

말 그대로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이란 어떤 것입니까? 과연 선지자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복을 빌어주고 위로나 해주고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말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선지자의 말에는 그런 말씀이 조금도 섞여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을 외치고 평안을 외쳤던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복이나 평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모세에게 대신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하게 된 말씀은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대언할 말씀도 십계명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십계명의 정신을 완벽하게 나타내 보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신다고 할 때 그 선지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완성자로 오셨고,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말씀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말씀이라고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육신 되어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선지자로 계십니다. 예수님이 따로 다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벽하게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며 또 다른 계시가 존재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죽어야 할 우리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말씀 앞에서도 죽지 않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20절의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한다면 그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선지자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말씀이나 계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도피성과 이웃

(신명기 19)

1. 도피성(19:1-13)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Deu 19:1 [도피성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하는 땅의 백성을 친히 멸망시키셔서 마침내 여러분이 그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성읍과 집에 들어가 살게 되면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Deu 19: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실 그 땅의 성읍들 가운데에서 셋을 도피성으로 구별해 놓으십시오.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Deu 19:3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실 땅을 세 구역으로 구분하고 누구라도 도피하기에 편리하도록 도피성들을 적당한 거리에 고루 배치해 놓으십시오.

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Deu 19:4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는데도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곳으로 도피하여 살 수가 있습니다.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Deu 19:5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친구와 함께 나무를 베러 숲속으로 들어가 도끼를 휘두르며 나무를 찍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나가 그의 친구를 쳐죽였으면 그는 가까운 도피성으로 피하여 살 수가 있습니다.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Deu 19:6 그는 본래 친구에게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할 이유가 없으나 복수하려는 사람은 홧김에 그 살인자를 뒤쫓아가서 도피성에 이르기 전에 그를 붙잡아 쳐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피성을 너무 먼 곳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Deu 19:7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우선 세 성읍을 지정해 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Deu 19:8 여러분이 처음 그 땅을 차지하고 살 때에는 세 도피성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여러분의 영토를 넓혀 주셔서 주께서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땅을 모두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9 또 너희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의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Deu 19:9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한 이 모든 계명을 지켜 행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평생 동안 주님의 가르침대로만 살면 여러분이 그 땅을 모두 차지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본래의 세 도피성에다 셋을 더 두십시오.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Deu 19:10 그리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에서 죄없는 피를 흘려 여러분에게 사람을 죽인 죄가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1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Deu 19:11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이웃에게 원한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에게 달려들어 쳐죽인 다음 이런 도피성들 가운데에 한 곳으로 피신하였으면

12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Deu 19:12 그의 고향 마을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도피성에서 붙잡아다가 복수하려는 사람에게 넘겨 주어 죽이게 하십시오.

13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Deu 19:13 여러분이 그런 살인자를 불쌍히 여기어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살인자를 그냥 두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이스라엘 땅에서 평안히 살수 있을 것입니다.

도피성은 오늘 본문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부터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도피성을 세우라는 것은 백성의 편리를 위해서 마련한 하나의 제도가 아닙니다.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도피성'을 통해서 신자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며, 신자가 모이는 그 모임에서는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우연히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련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 때문에 사형을 당하면 억울하니까 억울함을 없게 하기 위해서 도피성을 만든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도피성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면 애당초부터 하나님께서 실수로 살인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당연합니다. 본문에서도 실수로 사람을 죽인 예를 말합니다.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가 빠져서 옆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실수로 사람을 죽이도록 하시고, 또 다시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으셨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들게 하시고 또 이스라엘 안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있게 하셔서 그 사람을 도피성으로 피하도록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전체에 뭔가를 가르치시고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도피성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마음에 담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피성이란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기준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자와 실수로 죽이게 된 자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보수자의 손으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오직 도피성 한 곳 뿐입니다. 그곳에서만큼은 자기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가족도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했을 경우에만큼은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수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보수자가 자기 가족의 복수를 앞세워서 말씀도 무시해 버린다면 도피성으로 쳐들어가서 살인자를 죽여서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도피성으로 피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제사장이 거하고 있는 도피성에서 제사장의 은혜와 보호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자의 가족은 도피성으로 피해서 제사장의 은혜 아래 있는 자에 대한 복수를 포기함으로서 모두가 제사장의 은혜라는 방식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원칙과 기준 아래 살아가야 할 나라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바로 이 도피성의 정신 아래 굴복하는 자가 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도피성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도피성의 정신이 세상으로 확장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 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신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로 인해서 도피성의 정신이 드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도피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주안에서 산다는 것은 도피성 안에 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는 제사장이 죽으면 자유를 얻어서 세상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죄 없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없는 자로서 자유 함을 얻은 것입니다.

자유 함을 얻었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의 은혜와 긍휼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 그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미움과 복수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하심에 사로잡혀서 용서라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용서하라'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 되신 주님 안에서 배우게 된 긍휼과 은혜에 의해서 이끌려 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억울하게 죽는 일이 발생하게 하심으로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아난 긍휼과 은혜를 잊지 말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수 없이 살 수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일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라고 주신 땅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온 땅은 죄에서 용서받은 자만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땅입니다. 은혜와 긍휼이 살아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를 잊지 말라고 애매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발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땅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사회는 은혜와 긍휼이 기준이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나타나는 일이라면 내 개인의 유익쯤은 포기할 마음이 있습니까?

이 마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믿는 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원한을 가지는 것은 모두가 긍휼과 용서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받았음을 잊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게 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긍휼과 용서의 모습이 마음껏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2. 이웃 (19:14-21)

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Deu 19:14 [토지 경계선 보호 규정]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서 여러분이 살게 되거든 어느 누구든지 옛날부터 정해져 있는 이웃 사이의 경계선을 자기의 땅을 넓히려고 옮기지 마십시오.

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Deu 19:15 [법정의 증인에 대한 규정] 사람이 무슨 악행을 저질렀든지 무슨 죄를 지었든지 한 사람의 증언만을 듣고 유죄 판결을 내리지는 마십시오. 두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다음에야 판결을 내리십시오.

16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Deu 19:16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 씌워 해하려고 거짓말로 증언하는 자가 나타나면

17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Deu 19:17 당사자인 두 사람이 여호와의 성소로 가서 제사장이나 그때에 왕을 대신해서 재판의 임무를 맡고 있는 최고 재판관들에게 판결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Deu 19:18 그러면 그 최고 재판관들은 그 문제를 철저하게 살펴보고 만약 그 증인이 일부러 거짓으로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한 것이 판명되거든

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Deu 19:19 그가 자기 동족에게 입히려고 하였던 바로 그 형벌을 그에게 내리십시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에서 악행을 척결하십시오.

20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Deu 19:20 그리고 그 거짓 증인이 처벌된 소식을 온 이스라엘에 알리십시오. 그러면 모두 두려워서 더 이상 그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Deu 19:21 여러분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어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라는 원칙에 따라서 죄인을 철저히 처벌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주님의 긍휼로 살지 않는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만약 긍휼로 살지 않을 때 보여지는 현상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 보여 진다면 우리도 결국 긍휼로 가는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긍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긍휼의 법으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이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1-13절까지는 이웃을 미워하여 계획적인 살인을 한 사람에 대한 처벌이 나오고,

14절에는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고,

15-21절까지에는 위증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 모두는 이웃과 연관되어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긍휼만을 높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 가를 통해서 긍휼을 높이는지 아니면 옛 본성을 앞세우며 살아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미워해서 계획적으로 살인한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하거든 성읍의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서 그를 잡아다가 보수자, 즉 복수하고자 하는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로 넘겨서 죽이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그런 자를 긍휼이 보지 않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게서 제할 때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로 존속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미움에서 고의로 살인한 사람은 가차 없이 이스라엘에서 제하는 것이 이스라엘로 존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현재의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의 법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실행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그 율법에 담겨있는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힘 있는 이웃이 아니라 나보다 힘이 없는 이웃이 있을 때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그 예가 14절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조상들이 정한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3:10-11에 보면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 대한 횡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로운 자식이란 힘이 되는 부모가 없는 자식을 말합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힘없는 자의 것을 침범하는 것, 이것도 역시 주님의 긍휼을 무시하고 있는 불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힘 있는 자에게 대해서는 미워하고 시기하며 힘없는 자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눌러버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모습이고 교회에서 제하여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가진 자의 힘에 굴복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고 한다면 그 교회는 불신자의 집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5절부터 나오는 위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위증이란 무엇입니까?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거짓을 말함으로서 이웃을 함정에 빠뜨리고 해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사이가 나쁜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험담을 하는 것입니다. 험담 자체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악한 모습들이 교회에서도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하면서 험담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악입니다.

이웃에 대한 위증, 거짓말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본문 역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그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거짓말은 이웃을 해치고서라도 내 이득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이탈된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이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 곧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악입니다.

악을 살인하고, 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거짓말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세상 수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다만 살인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바르게 산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수준은 전혀 다릅니다.

미움이나 살인, 약한 자를 억누름, 거짓말, 이런 모든 행위가 도출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산다는 것을 망각한 것을 근본 문제, 즉 악으로 말씀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 힘으로 자기의 이득을 꾀하며 살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악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두고 그 나라를 소원하며 산다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기뻐하며 살고자 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은혜와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채우기 위해서 이웃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약한 자를 누르고,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 사람은 자기가 상상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있었을 뿐입니다.

본문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자는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며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이 최선의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기 때문에 현재의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결국 피해를 입는 자들은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자연히 이웃에게 그 득이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로 모이면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가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교회의 모습을 상실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 이웃에게 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게 하신 존재입니다. 이웃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손해를 보시고 이웃인 우리들에게 이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이웃의 득을 위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믿음이 없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지 않는 존재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자신의 부족을 고백할 때 이것을 가지고 '믿는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가를 점검하십시오.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행동에는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지의 여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자인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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