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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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나는 용서를 받았는가? (마18:21-22, 신,31) 06월 17일 조회수 : 591
  작성자 : 하남은광 작성일 : 2018-08-11

만약 성경을 문자의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 신자에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을 가르친다면 기독교는 많은 혼란과 비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근거로 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 생명나무가 감추어졌고, 단절된 생명으로 향하는 문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열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근거로 해석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의 의와 욕망을 위한 해석과 이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1. 과연 인간에게 무한한 용서는 가능한가?

용서 이야기는 베드로의 질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가 갑자기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용서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았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답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 내용에서 이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마 무한한 용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한한 용서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무한한 용서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곧 문자적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자적 해석이 갖고 있는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문자적 의미를 따라서 무한한 용서를 실천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의미가 무엇일까요?

2. 용서를 위해 죄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한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용서는 인간의 죄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죄를 덮고 있는 의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용서를 위해 하나님이 필히 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죄를 그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남으로써 인간은 용서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 용서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죄의 자리로 끌고 가시고 죄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한한 용서를 실천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는 용서라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용서할 수 있다는 자기 의를 근거로 질문하는 베드로에게 인간에게서는 용서의 의가 나올 수가 없다는 답을 하신 것이 됩니다.

3.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신자가 모이는 그곳에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죄를 무조건 덮어주고 죄에 대한 처벌 또한 생략하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그런 것이라면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생명나무를 감추지 말았어야 하고, 남자와 여자와 뱀에게 내린 징벌 또한 생략하셨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는 세상에서 범죄한 자를 무조건 용서해야 하느냐와도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생각할 때 작은 자는 자신을 하나님이 용서가 아니면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악한 죄인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야 말로 벌레보다 못한 존재임을 아는 그것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작은 자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작은 자를 업신여긴다는 그것이 곧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피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고, 이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용서를 실천할 수 없는 우리의 속성과 악함으로 뭉쳐 있는 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악한 죄인이라는 존재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가 근거가 되어 모이는 교회이며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신자가 모이는 그곳에 용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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