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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로마서 특강7, 하나님의 의의 계시(롬 1:1-8:39) 김희중 목사(20210521) 조회수 : 300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1-06-01

로마서 특강7(롬 1:1-8:39) 김희중 목사

20210521 로마서 07

1, 하나님의 의의 계시 (1:1-8:39)

. 머리말 (1:1-17)

1. 인사말 (1:1-7)

2. 바울의 관심사 (1:8-15)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1:16-17)

. 정죄(죄가 있다고 판단하고 단정함) :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 (1:18-3:20)

1. 이방인의 죄 (1:18-32)

정죄의 원인 :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이 원인 (1:18-23)

정죄의 결과 : 하나님의 유기(버려두심) (1:24-32)

2. 유대인의 죄 (2:1-3:8)

진리에 따른 심판 (2:1-5)

행위에 따른 심판 (2:6-10)

공평한 심판 (2:11-16)

율법을 지키지 않음 (2:17-29)

약속을 지키지 않음 (3:1-8)

3. 전 인류의 죄 (3:9-3:20)

. 칭의 : 하나님의 의의 전가 (3:21-5:21)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3:21-31)

2. 의의 예증 (4:1-25)

여러분, 오늘은 로마서 4장입니다.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Rom 4:1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만 해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문제로 어떤 경험을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신 것이 과연 그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그는 그 일을 자랑하고도 남을 만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은 내세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1 우리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세상에서 부자가 좀 되었다고들 하는데, 양떼, 소떼가 많아졌다는 예기겠지요?

그러나 하나님 믿고 겨우 그것밖에 못 얻었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양이나 소나 가축을 얻은 그 정도 같으면 하나님 안 믿고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양떼 소떼가 늘어났다는 그것을 가지고 복이라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 것은 복의 일부분도 안 되는 아주 하찮은 거예요.

진짜 복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는 거지요(이사야 41:8).

2절입니다.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Rom 4:2 (1절과 같음)

2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Rom 4:3 그래서 성경에도 ㄱ)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믿는 아브라함을 흐뭇하게 생각하시고 그를 인정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 70인역 창15:6)

3 성경에 "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창15:1-6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소돔전쟁을 끝내고 전리품을 다 정리한 후에 빈손으로 헤브론으로 돌아온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면 굳이 하나님께 상을 받고자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신다고 해도 하나님이 상급이 되어주신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해 이미 가장 든든하고 부족함이 없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소유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거나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상으로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의지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2)고 답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말하기를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3)고 합니다.

아브람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브람이 갑자기 자식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하나님이 많은 수의 자손을 약속하셨지만 실제 현실은 자식이 없어서 종의 신분으로 있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아들, 상속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실현 가능성을 현실의 조건으로 따지고 있었던 거지요.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에게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 본문의 배경이 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주의할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의인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인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믿는 자신에게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은 의가 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즉 믿어주는 행위조차도 의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무엇을 믿었고 어떤 믿음이 의가 되는 것일까요?

아브람은 단순히 후손이 많아질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아브람의 믿음은 자신의 가문 번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오류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내게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것을 기대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향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이러한 다름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여호와께서 의로 여기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를 보면 믿습니다 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믿음은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을 믿는다는 수준에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도구 삼아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면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책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차원 높은 믿음을 보여준다고 인정받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보였지만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단지 믿음 좋은 자신들을 복주는 분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을 의로운 자로 여겼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행함을 기반으로 한 스스로의 생각이고 착각이었을 뿐입니다. 의의 조건을 자신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에게 자식이 없기 때문에 엘리에셀이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자식이 없으니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의 해결책을 받아주지 않으시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상속자가 있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아브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곧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은 믿음의 내용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내세웠던 자신의 해결책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아브람에게 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은 인간의 행함과 방법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실 구원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의가 되는 믿음은 하나님의 개입과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자신의 행함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행함은 단절되고 예수님의 이루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죄로 인한 자신의 한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의가되심을 바라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의로 오셨음을 믿기에 그 믿음이 우리에게 의가 된 것입니다.

4,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Rom 4:4 그러니 아브라함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은 그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만일 선한 일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구원을 값없이 주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일한 대가로 얻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심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4 공로가 있는 사람이 받는 보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품삯을 받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느 집에 가서 삯을 받기로 하고 일을 열심히 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날 삯을 주는 거예요. 그것은 은혜가 아니지요?

일을 했으니까 당당히 삯을 받아요. 일 시킨 사람이 일 한 사람에게 빚을 진 거예요. 일 시킨 사람이 일 한 사람에게 빚을 진거죠? 그렇죠? 품삯을 빚졌잖아요.

그러니까 일당을 주고 월급을 주는 것은 빚을 갚는 거지요.

그런데 5절 보세요,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Rom 4:5 (4절과 같음)

5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렇죠?

2천 년 전에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주님을 위하여 한 것이 뭐가 있어요? 아무 것도 없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거예요.

일도 안 했는데, 아무 선한 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Rom 4:6 다윗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 하나님께 ㄴ) `죄 없는 자'라고 선언받는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글자대로는 `의롭다')

6 그래서 다윗도 선행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Rom 4:7 ) `얼마나 복되랴. 허물을 용서받은 이들은. 죄지었으나 다시 가리움을 받은 이들은. (. 32:1-2)

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Rom 4:8 얼마나 복되랴. 마음이 간사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죄를 묻지 않는 이들은.‘

8 주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

시편 23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이죠?

그러니까 분명히 불법이 있고, 죄가 있고, 허물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죄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인정을 안 해 버려요.

왜요? 그 죄 값을 지불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어떤 사람의 죄는 하나님께서 간과하신다는 거예요.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Rom 4:9 그러면 이제 이 복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동시에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교의 규칙은 지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만 믿으면 주어지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그가 믿음을 통해서 이런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만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유대교의 규례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까?

9 이러한 행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누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누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Rom 4:10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언제 아브라함에게 이 복을 베푸셨느냐 하는 질문부터 대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가 유대인이 되기 전, 곧 유대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의식인 할례를 받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10 언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입니까? 받기 전입니까? 할례를 받은 후가 아니라 받기 전의 일입니다.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거예요.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Rom 4:1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신 때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부터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아들이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고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할례의식은 그 확인의 표였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사람들의 조상인 셈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규례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1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것을 확인하는 표로 그는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Rom 4:12 동시에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의 믿음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오직 할례만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믿음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또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할례받은 사람들이란 그저 할례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보여준 믿음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

13 아브라함이나 그 2)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Rom 4:13 [믿음으로 이루어진 약속]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율법이 나타나기 4백 년 전에 하나님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 되었느니라

Rom 4:14 그런데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의미가 없다. 믿음이란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14 만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Rom 4:15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복과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그의 진노를 사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기지 않는 한가지 방법은 어길 수밖에 없는 율법을 갖지 않는 방법뿐입니다.

15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위를 이끌어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이 진노의 자식임을 몰랐고 내가 바로 멸망의 자식임을 몰랐는데 율법을 받고 보니까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전혀 어긋나 있는 멸망의 자식이라는 것이 발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일을 율법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2)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Rom 4: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값없이 주는 선물인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의 복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여기 보면 아브라함을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린 분명히 유대인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되어 질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 후사라는 뜻입니다.

16절에서도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후손이란 조상을 닮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아브라함을 닮았다는 것이 바로 후사, 또는 조상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을 닮았다는 것은 신체나 얼굴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믿음의 모습이 곧 우리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진 믿음이 아닌 것은 모두가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인 것이고, 이러한 믿음이 있는 자가 곧 아브라함의 후사이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Rom 4:17 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아브라함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다 받아들이십니다. 이 약속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장래에 될 일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처럼 확실성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 70인역 창17:5)

17 성경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Rom 4: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주실 것이며 ㄴ) 그 아들에게서 많은 자손이 나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런 약속이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 15:5)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4)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바랄 수 없고 기대도 할 수 없는, 한마디로 말해서 실현 가능성 0%인 확률에 자신을 맡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까?

결국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그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었던 그 현실은 무엇입니까?

19-20절을 보면,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Rom 4:19 그의 강한 믿음은 자신의 나이가 이미 백 살이 다 되어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거나 아내 사라 역시 아기를 갖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하는 사실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Rom 4:20 염려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더 강하게 자라 아직 그 일이 실현되기도 전에 자기에게 베풀어질 복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아브라함은 99세였고 사라는 89세였습니다.

이는 인간의 생식 기능이 이미 다 죽어버린 시점입니다. 생식기능이 죽은 가운데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미친 짓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번 믿어나 보자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요행을 바란 것이 아니라 되어 진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이나 아내의 생식기능이 다 죽어버린 것을 알면서도 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믿음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믿음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17).

이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에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이 개입될 수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은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행함을 갖다 붙이지 말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사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여러분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십니까?

여러분을 죽은데서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하시는 하나님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죽음이 두렵지 않아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24절에 보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죽어도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믿음에는 죽음이 아닌 생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아브라함의 믿음을 대조해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그만한 믿음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있다면 버리십시오.

믿음에 종류가 있고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들어서 믿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만큼 되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믿음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가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것을 가짜로 드러내시고, 인간의 힘과 가능성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나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세상적인 조건과 환경 형편 때문에 약해지거나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졌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믿음은 언제나 불변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마음이 믿음에 복종되어지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더 복종되고 흔들리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거든 그것으로 기뻐하십시오.

신자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자입니다.

'목사님,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는데요'라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없는 것을 목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목사가 믿음을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목사는 다만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릴 뿐입니다.

엉뚱한 것을 믿음이라고 붙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거든 할 일은 하나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도저히 나는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 하늘의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런 마음조차도 죽은데서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잊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Rom 4:21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약속도 실행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Rom 4:22 아브라함의 이 ㄷ)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죄 없는 자'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 70인역 15:6)

22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5)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가 호락호락하게 볼 수 없어요. 그리고 믿음만 있습니까? 그의 순종을 보세요.

하여간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한 것을 지키실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내 하나밖에 없는 이삭을 죽여도 죽은 자를 살려내서라도 어떻게 하겠지. 이런 믿음이 있었으니까 얼마나 어렵겠어요?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인 것으로 무엇으로 확정할 수 있느냐? 정말로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니까요.

만약에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이게 안 믿어졌다면 죽어버리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하나님 장난치는 겁니까?’ 하고 대들 수 있는데, 하나도 대들지 않고, 그것은 그대로 믿고 이삭은 이삭대로 바치는 데까지 간 겁니다.

백 살에 얻은 독생자를 죽이는 데까지 순종했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 순종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 첫머리에 믿어 순종케 한다는 거예요.

믿어 순종될 때 그게 믿음이지, 말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안 믿어지도록 믿습니다. 이게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믿어 순종케 되도록 해야 돼요.

그래서,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Rom 4:22 아브라함의 이 ㄷ)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죄 없는 자'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 70인역 15:6)

22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5)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Rom 4:23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여 의롭다고 인정하신 이 복된 선언이 기록된 것은 단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하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Rom 4:24 우리들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아브라함을 받아들인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24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복음서의 기록인데 잘 읽어 보세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원수들에게 잡히실 때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고, 또 그날 밤에 그 자리를 피해버리면 안 잡히실 수 있었고, 안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렇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이렇게 기도하시지 말고 그냥 지중해 바다 위를 걸어서 피해 버리시면 그만 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고민하면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고, 그리고 거기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는데, 그 피와 죽으심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어질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믿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아브라함처럼 믿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옵니다만 아브라함도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죠.

이미 이렇게 할 때 받았다는 겁니다.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Rom 4:25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셨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는데, 그 살아나신 것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흘린 이 피가 내가 잘못해서 흘린 피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흘린 피였다는 것을 증빙하고, 따라서 내가 흘린 피로서 너희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증빙을 하려고 죽음을 이기고 살아난 것을 봐라. 이제 믿을 만 하지 않느냐?”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죄 때문에,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내어주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바울이 말하는 로마서라는 것이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믿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는 뭐가 나오느냐?

그것은 일단 우리 입이 막혀야 돼요. 아직도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할 말이 있고 그러면 이 복음의 말씀을 제대로 안 들어서 그래요. 제대로 들으면 천하에 입이 다 막혀야 됩니다.

여러분,

제가 수도 없이 강조하여 이야기 했죠?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동일한 죄인입니다.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죄인이고,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다 죄인이에요.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반드시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줄 알며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

3 길 외에 소망이 없는 자인 것을 인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는 줄 믿습니까?” 그렇게 물어봐요.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돼요.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정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길이 열린 거예요.

이 길은 예수님 이전에 이후에 아무도 닦아놓은 사람이 없었고, 오직 예수님만 이 길을 열어놓으신 거죠.

그리고 그 때까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전부 모형으로 하던 것이었고, 예수님 오셔서 실제로 그 길이 열리면서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서 이 믿음의 길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라가는 길을 확실히 발견하고, 예수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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