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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1907한국교회부흥보고서(성령의불이 한국을 휩쓸었을때) 조회수 : 2001
  작성자 : 순교자 작성일 : 2010-03-16

 성령의 불이 한국을 휩쓸었을 때 (1907년 한국부흥 보고서)(When the Spirt’s Fire Swept Korea)

 

죠나단 고포스


성령의 불이 한국을 휩쓸었을 때


내가 한국에서 일어났던 이 부흥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것이 나에게 큰 의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성도들이 이룬 성취와 그들이 바친 희생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주님께 드린 것들이 너무 적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내가 중국에 돌아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을 말했을 때, 이야기 도중 통회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중국인 성도들이 허다했다

자신이‘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산’자 임을 자각한 자로서, 한국에서 일어난 복음의 승리의 기록을 열린 마음으로 듣는다면,

 당신 역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겸비하여질 것이다.

 

그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던 해인 1907년에 나는 한국에 가서 여덟 곳의 선교부를 방문하였다. 

중국에 돌아가 목단에서 중국 성도들에게 한국의 부흥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또‘페이타이호’에 가서 거기 있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을 말하자 어떤 선교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와 같은 부흥의 축복이 중국에도 임하도록 기도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치쿵샨’에 초대를 받아 그곳 선교사들에게 한국 부흥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주일 저녁 그 이야기를 하였는데, 너무 길었던 것 같아 나는 급히 축도를 하고 강대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청중들은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듯한 정적이 장내를 덮었고 그것이 약 6, 7분간 계속되더니

청중들 가운데서 목 메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 과거 서로 나쁜 감정을 품었거나,

언쟁을 했던 것, 그 외 맺혔던 일들에 대해서 피차 용서를 구했다. 

집회는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며, 사람들은 성령의 정결케 하시는 불이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을 깨달았다. 

 그 후 4일간 기도와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것은 내가 참석한 선교사 모임 중 가장 은혜스러운 경험이었다.

  그 모임에서 우리는 매일 오후 4시에 중국 교회에 부흥이 올 때까지 기도하기로 약속하였고,

그 해 가을부터 중국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1908년에 들어서자 만주와 기타 지방에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가 전파되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성도들이 더 큰 은혜를 갈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

 

한국에서 부흥이 일어날 기미가 처음으로 보인 것은 1903년이었다. 

 동해안의 원산에서 사역하던 의사 하디(Hardie) 선교사가, 그곳에 있는 선교사들끼리 모이는 작은 기도회에서,‘기도’에 대해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하디가 요한복음 14장을 중심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성령께서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하디가 설교할 때 선교사들은 깊이 감동을 받았고 그 후 한국인 성도들의 모임에서도 하디 선교사의 설교는 역시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하디는 계속해서 한국 내에 있는 열 군데의 선교본부를 순회하면서 기도에 관하여 설교를 하였고, 1904년 1년 동안에만 1만 명의 한국인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부흥은 이러한 능력과 열매를 보이면서 1906년까지 계속되었다.

 

1907년 6월에 나는 평양에 있던 스월렌(Swallen) 선교사로부터 그들이 목격했던 바, 한국 대부흥의 발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하기를,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1906년 여름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것 이상으로 큰 부흥을 더 보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 했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중국이나 일본, 기타 국가에서 드러난 선교의 결과와 한국에서의 결과를 비교해 보고, 한국에서 나타난 열매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훨씬 많았으므로, 아마 이 이상 더 큰 축복은 바랄 수 없으리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1906년 9월 우리가 서울에 갔을 때, 마침 인도를 지나 서울에 도착한 뉴욕 출신 H. A. 죤스

톤(Howard Agnew Johnston) 박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인도 캇시야 힐즈(Kassia Hills)의 대부흥에서 1905년과 1906년 두 해에 8천2백 명의 회심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무색해져서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사들이 20명 이상 있었는데,

 우리들은 모여서 의논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니, 캇시야 힐즈에서 주신 축복을 평양이라고 안 주실 리 없다, 보다 큰 부흥이 일어날 때까지 매일 정오에 모여 기도를 드리자고 합의하였습니다.

“약 한 달쯤 기도를 계속했을 때, 한 형제가 말하기를,‘우리가 한 달이나 기도했지만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소.

우리는 시간을 많이 들였지만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평소처럼 각자의 일을 계속하면서,

 집에서 편한 시간에 기도하기로 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의견은 그럴 듯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인도 캇시야에 내리신 축복을 평양이라고 거절하실 리 없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그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시간을 줄이는 대신 더 늘렸다. 

즉 12시부터 4시까지를 기도회 시간으로 정했고, 그 후에도 저녁 식사 때까지 원하는 이는 자유로 기도하자고 하였다. 

기도 외에도, 누군가 어떤 힘이 될만한 간증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자유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들이 약 넉 달 동안 기도했을 때 우선 나타나게 된 결과는 그들 사이에서 감리교니 장로교니 하는 관념들이 다 없어져 버리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깨달아진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교회의 연합이었으며, 그 연합은 기도를 통해서 실현되었으니 지속될 수 밖에 없었고,

이 연합을 통하여 지극히 높으신 자가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그 무렵에 스월렌(Swallen) 선교사와 블레어(Blair) 선교사 두 사람이 지방에 있는 개척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평소와 같이 예배를 인도할 때, 예배 도중 많은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월렌(Swallen)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그런 이상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은 도대체 처음이었으므로,

회중을 휩쓸고 있는 감정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찬송가 한 장을 부르게 하였다.  두 세 번을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고, 마침내 스월렌(Swallen) 선교사는 그 집회를‘다른 분(성령님)’이 주장하고 있음을 홀연히 깨닫고 놀랐으며,

자신은 가능한 한 뒤로 물러나 있었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그와 블레어(Blair) 선교사는 기쁨에 넘쳐 평양에 돌아와, 그 개척지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말하였다. 

 이에 모두들 하나님을 찬양하고, 평양을 축복하실 시기가 임박했음을 믿었다.

1907년 정초가 되었다.  정월 첫 주간에 연합기도회로 모였는데 성도들은 이 기간 중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내릴 것을 믿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인 제 8일째까지도 아무런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주일 저녁에는 약 1500명이 중앙 장로교회에 모였으나, 회중 위의 하늘은 마치 놋쇠가 덮여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갈구하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것일까?  

 

 이 때 돌연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길 장로가 일어나더니 충격적인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간이요. 하나님은 이 놈 때문에 은혜를 안 주시는 겁니다. 약 1년 전 내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나를 불러

다 하는 말이,‘길 장로, 나는 이제 죽게 되었는데, 길 장로가 내 사후처리를 해 주게. 내 아내는 못 할 것이니.’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염려 말게. 내가 잘 처리하지’하고는 그의 가산을 정리해 주었소. 그러나 저는 그의 재산 중에서 100달러를 가로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막고 있었소. 저는 내일 아침 100불을 그 과부에게 갚겠소이다.”


순식간에 막혔던 것이 거두어지고, 거룩하신 분,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  죄에 대한 회개가 청중을 휩쓸기 시작했다. 

주일 저녁 7시에 시작된 그 집회는 월요일 새벽 2시에야 끝났는데,

그 시간 내내 사람들은 울면서 차례차례 일어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날부터 성도들은 다시 매일 모였고, 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타작마당을 깨끗게 하시는 분으로서 성전에 임하셨다.

  이 때 일어난 죄의 고백들은,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마귀가 아니면 성령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빛에 비추임을 받은 사람이라면, ]

교회의 지도자가 그런 죄를 고백한 것이 마귀가 시킨 것이었다고는 잠시라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죄가 감추어져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전능하신 이의 팔을 막았던 것이며, 그 죄가 고백되자 즉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해에 한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죄의 고백들을 통하여 죄의 권세가 힘을 잃었고,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지속적으로 받으셨던 것이다.

 

이 부흥은 실제적인 열매를 맺었는가?

몇 가지 예를 소개하려고 한다.
어떤 의사 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가 한국에서 제일 정직하다고 늘
자랑을 하였었다(동양에서는 요리사가 시장에 가서 물건 사는 일도 겸한다).  그런데 그 요리사가 집회에서 마음에 찔림을 받고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나는 늘 의사 선생님을 속여 왔습니다. 제 집

이나 재산은 다 의사 선생님을 속여서 모은 돈으로 산 것입니다.”그리고 그 요리사는 자기 집을 팔아 의사에게서 훔친 돈을 갚았다.

 

어느 학교 교사는 선교부로부터 얼마의 땅을 사 달라는 부탁을 받고 땅을 물색하여 그 값이 500불이라고 말했다.

값이 꽤 비쌌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상하다고 말하면서도 땅값을 지불했었다. 

그러나 부흥회 기간 중 그 교사는 실제 땅 값이 80불이었음을 고백하였고,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 선교부로부터 사취한 420불을 갚았다.

미국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와 있던 맥켄지(Mackenzie) 씨는 한 소년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 소년이 4불 정도의 돈을 훔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년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80마일을 걸어와서,

그 돈을 맥켄지(Mackenzie) 씨에게 전해 달라고, 어떤 선교사에게 맡기고 간 일도 있었다.  맥켄지(Mackenzie) 씨가 감동을 받아 이같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믿는 것과 같은, 강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의주에 살던 어떤 사람은 처자를 버리고 다른 도시에 가서 돈을 벌어 거기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빛을 받게 되자 후처와 딸들의 생활 대책을 마련해 놓은 다음, 의주의 본처에게 돌아가게 된 일도 있었다.  오늘날 이혼이 성행하는 기독교 나라들에서 만약 한국 교회에 일어난 것과 같은 부흥이 일어난다면 그 사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어떤 집사 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완전한 성도로 보였었는데, 부흥이 진행됨에 따라 몹시 불안해 하더니 마침내 자기가 교회의 구제비에서 돈을 훔쳤다고 고백하였다. 

모두들 놀랐으나 이제는 그 집사가 평안을 얻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빠졌고 결국 그는 자신이 7계명도 범하였음을 고백하였다.

 

어느 부인은 몇 날을 두고 지옥과 같은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다가, 마침내 회중 앞에서 자신의 간음죄를 고백하였다. 

그 집회를 인도하던 선교사는 대경실색하였다. 

왜냐하면 그 부인의 남편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고 분노한 그가 한국의 관습대로 간음한 아내를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의 곁으로 다가가 그 옆에 꿇어 앉아 아내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주 예수께서 이 한국 여인을 향하여“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죄를 속하시고 생명을 다시 주신 예수님께 큰 영광이 돌아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들은 사람들을 뒤흔들지 않을 수가 없었고, 예배당은 군중들로 꽉 차게 되었다

조롱을 하려고 왔다가, 두려움 가운데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도적의 두목 한 사람이 호기심으로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심하고 바로 판사를 찾아가서 자수를 하였다. 

그러나 놀란 담당자는 한국에서는 고소인이 없으면 재판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냥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당시 부흥이 일어났던 때에,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서양의 불가지론적 철학사상에 물든 사람으로서, 그에게 있어서 영적인 일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평양에 거류하고 있는 일본인들에게도, 그들이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사정을 알아보려고 집회에 참석하였다.

결국 그의 불신 사상은 사라져버리고, 주 예수를 따르는 성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신속한 역사

스월렌(Swallen)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드린 수개월의 기도는 크게 응답받았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일하시니, 우리들 선교사 모두가 반 년이나 걸려서 할 일을,

하나님께서는 반 나절에 하셨습니다.  2개월 이내에 2000명 이상의 이교도가 회심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앞장서시면, 언제나 이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체의 일에 분망하여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1903년에 일어나기 시작한 부흥은 점점 커져서, 급기야 평양을 중심으로 한국 전역에 넘쳐 흘렀다. 

1907년 여름까지, 회심자의 수는 평양에서만 30000명에 달하였다. 

당시 평양 시내에는 네 다섯 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그 중 중앙장로교회는, 좁게 앉으면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한국의 예배당에는 의자가 없고, 마루 위에 자리를 깔고 회중을 앉힌다. 당시 중앙 교회는 2000명이 앉으면, 누구라도 다

리를 좀 펴려고 잠시 일어났다가는 다시 앉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잠시 일어난 사이, 그 자리가 금방 메워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결국 성도의 수가 3000명이 되자, 아무리 좁혀 앉아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여자들이 먼저 모여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 남자들이 들어와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취했다.이와 같은 부흥의 기세는 1910년에 이르러서도 꺾이지 않았는데, 1910년 10월의 어느 한 주

간에는 4000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외에도 수 천명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이름을 써 냈다는 것이다.

 

평양 남쪽에 있는 옛날 수도인 송도(개성)를 들렀는데, 1907년 부흥의 때에 500명의 새 신자가 교회에 들어왔고,

 1910년의 특별집회가 있었던 1달 동안 무려 2500명이 모였다고 한다.

우리가 1907년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교회들은 대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선교사 한 분은 말하기를 6주간의 순회 기간에 세례를 베푼 것이 500명, 학습문답을 받은 수가 700명,

그리고 5 개이던 개척 교회가 1년 사이에 25 개로 늘었다는 것이었다. 

1910년 1년 동안에 서울에서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고 결신서를 낸 사람이 13000명이었고,

그 해 9월에 감리교회에서는 서울에서만 3000명이 세례를 받고 성도가 되었다.

1907년 서울의 서쪽에 있는 제물포에 감리교 선교부는 교인 수 800명의 교회가 있었다. 

 제물포 항구 앞에 섬이 하나 있었는데 17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 중 4247명이 세례교인이었는데, 그 반 수는 1907년 그 해에 새로 믿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 섬의 성도들은 섬 전체가 빠른 시간 내에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아담스(Adams) 선교사는 한국 남부의 도시인 대구에서 부흥을 위해 10일 간의 기도회를 열었는데, 제 7일째에 성령이 홍수와 같이 임하여 성도들에게 부흥이 일어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부흥의 결과 대구 시의 교회들은 너무 비좁아졌고, 도처에 교회들이 개척되었다. 1905년에는 1976명의 회심자를 얻었고, 1906년에는 3867명, 1907년에는 6144명을 받아들였다.  아담스 선교사가 말하였다. “이 나라 곳곳

에 전에 보지 못하던 교회들이 계속 세워졌으며 어떤 교회들은 전도자가 가본 일이 없는 곳도 있습니다.” 그 중 선교사나 전도사의 도움 없이 세워진 한 교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한 마을 사람이 도시에 나갔다가 복음을 듣고는 성경 한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계속 성경을 이웃 사람들에게 읽어주었고 그 결과 50명 이상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신약 성경을 보고, 신자가 되려면 물로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까지는 알아내었으나 도대체 어떻게 세례를 베푸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의논한 결과 각자 집에 가서 목욕을 한 후 다시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들을 기뻐하신 줄로 믿는다

.

우리가 1907년에 방문한 또 하나의 선교부는, 평양에서 북쪽으로 가는 철로 연변에 있는 선천이라는 곳이었다. 

그 고을에는 선교사가 자리 잡은 지 불과 8년 밖에 안 되어 우리는 큰 기대를 갖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가 보니 읍과 시골에 있는 성도의 숫자는 15348명이나 되었으며, 이 수는‘교회에 참석하고 연보를 드리는’성도들만 꼽은 수였다. 그들은 이제 막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완공하였다.  1년 전 그들의 교회는 800명이 앉을 수 있었으나, 성도의 수가 870명이 되어 더 큰 교회를 지어야만 했다.  그 해에 중앙교회는 시골에 5개의 지교회를 세웠고 교회당이 완공되었을 때는 교인의 수가 1445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교회에서 뻗어나간 길거리에는 믿지 않는 집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가 성도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기독교 국가의 속담에‘교회당이 가까우면 은혜는 멀다’라는 말이 있는데,

교회 부근에 구원 받지 못한 집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한국 교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성령 하나님을 높였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렇게도 강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 주위의 안 믿는 사람들까지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1916년 한국의 동해안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던 푸-트(Foote) 선교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 주었다.

 어느 주일 저녁 그는 새로 증축한‘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는데 교회는 2500명의 회중으로 꽉 차 있었고, 그 마을에 있는 또 다른 교회도 500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마을의 총 인구는 3000명이었다. 

결국 그 마을의 주민 전부가 성도이었고 그날 저녁에는 주민 모두가 교회에 나왔던 것이다. 

아마 서양의 기독교적인 사회에서도 이와 같이 교회에 모일 수 있는 특권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주님께서는 후일 이 문제에 대하여 엄히 문책하실 것이다.

 

나는 그 센터를 중심으로 사역이 얼마나 퍼져나갔는지 알기 위하여 블레어(Blair) 선교사에게 대강 지도를 그려서 설명해 달라고 하였다.  마침 기차 시간이 촉박해 있어서,

그가 급히 그린 지도는 압록강의 동쪽, 해안에 있는 노악천이라는 군의 약도였다.  블레어 선교사는 그 약도의 중앙에 350명, 거기서 북쪽으로 1 마일도 못 되는 곳에 250명의 교회, 북동쪽으로 5 마일 되는 곳에 400명의 교회, 동쪽으로 약 2 마일 떨어진 곳에 750명의 교회….

이렇게 하여 그 군 내에만 14개의 자립교회가 있음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던 휫트모아(Whittemore) 선교사가 말하였다.

 “그 군은 제가 일하고 있는 그 북쪽의 군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곳에는 35개의 자립교회가 있고 성도가 5000명입니다.” 어떤 교회는 400명이던 교인 수가 1년 후에 3000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1884년에 한국 선교를 시작한 이래 그 지역에서는 평균 45분 마다 한 명씩 크리스찬이 늘었고, 그 결과 군민 전체가 믿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른다. “숫자는 문제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떼를 지어 따르던 무리를 실망시키신 일이 있었다”라고.  맞다.  좋은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우리가 적용해야 할 표준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앞 부분으로 가보자.  서양의 교회들이 이 표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국 교회를 사도행전적인 교회로 보는 견해에는 서슴지 않고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면 한국 교회가 어떻게 오순절의 표준에 도달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초대교회는 성령이신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고, 그의 강림을 고대하며 성도들이 만사를 제치고 10일간 전심으로 기도하였다. 

이미 말한 대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은 성령이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일 한 시간 내지 수 시간씩 수개월 동안 기도회를 계속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인도의 캇시야 사람들에게 부어졌던 성령의 은혜에 대해 A. H. 죤스톤 선교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 죤스톤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중에 압록강 부근의 소나무 삼림 속에 있는 강계에서 온 권서인(성서를 판매하는 행상인, 역자주)이 하나 있었다.  그는 집에 돌아가 강계 교회에 있는 250명 성도들에게 성령만이 그리스도의 남기신 과업을 효과적으로 성취시킬 수 있으며, 성령은 다른 여러 은사와 함께 누구에게나 주시도록 약속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고, 이 성령의 은혜를 받기 위해 5시에 -매일 저녁 5시가 아니라 매일 아침 다섯 시이다

- 모여서 기도회를 열기로 하여 1906년 가을부터 1907년 봄까지 계속하였다.

결국 성령님이 홍수와 같이 임하였고 교인의 수는 몇 갑절로 늘어났다.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이신 성령을 믿는가? 

 우리 모두 솔직하자.  믿는다 해도 추운 겨울에 여섯 달 동안이나 새벽 5시에 일어나 성령을 구할 정도까지는 믿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순절 당시 초대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심에 불타올랐다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에서도 결코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자들의 핍박을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신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구주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불신자들은 집을 팔아 그리스도인이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지 좀 쉴 수 있겠다고 불평했을 정도였다.

평양에 있던 선교사들은 그들의 고등학교에서 성령 하나님을 높였다.  그 학교에는 318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1907년 2월 어느 월요일 개학식을 하기 전에 선교사 두 사람은 교장실에서 성령께서 학기의 시작부터 학교를 주장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성령께서 주장하시지 않는다면, 학교는 오히려 한국 사회에 해가 되는 교육받은 악인들을 배출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 기독교국가에서도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성령의 지도대로 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어떤 학교들은 무신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교육받은 악인을 사회로 내보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라의 돈을 도적질하고 이런 지도자들의 죄가 늘 적발되고 있다. 

이들은 소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찾아볼 수가 없다. 

교육 현장에서 하나님을 높이지 않은 대가를 우리는 현재 받고 있으면서도, 이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고 있다.

 

그 월요일 아침, 9시 종이 치기 전에 주의 성령은 평양고등학교의 학생들을 죄에 대한 자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위층과 아래층에서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얼마 후 교장실에는 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 날 학교는 개학을 하지 못했고, 다음 날도 못했고, 금요일까지 여전히 개학을 못하였다.  금요일 저녁때가 되어 장로교 학생들은 회개의 과정을 통과하고 모두 승리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감리교회의 학생들을 뒤로 잡아당기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결국 금요일 저녁 약 10여명의 감리교 학생들은 자기 교회의 한국인 목사님을 찾아가 목사님과 했던 약속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한국인 목사는 부흥이 감리교회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리교 학생들을 그에 반대하게 하고, 대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마귀가 시키는 것이니 그것을 절제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금요일 밤에 감리교 학

생들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들은 그 약속을 풀어달라고 간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감리교 목사는 선교사를 찾아가 그 발 앞에 엎드러져, 부흥이 장로교회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마귀가 자신의 마음을 시기심으로 가득 채웠다고 고백하였다.  한 선교사가 말하기를, 그 주간에 학생들이 울며 고백하는 죄상들은 차마 듣고 있기가 무서웠다고 한다.  마치 지옥의 뚜껑을 잡아 당긴 듯,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죄들이 드러났다고 한다.  그 다음 월요일, 학생들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그리고 선생

님과의 사이에, 또 학생들 사이에 관계가 회복되었고, 학교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개학을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전국의 감리교회에서 약 100명의 설교자들과 권서인 들이 1개월 간의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하였다. 

 연합 기도회를 가졌던 선교사들은 이 중요한 집회를 성령의 인도에 맡기기로 하였다.  그들은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못하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신으로만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을 높였을 때, 집회 첫날부터 그의 임재와 능력으로 보상해 주셨다.  수일 이내에 굽었던 모든 일들이 바로잡아졌다.  성령님께서 그들을 주장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한 달간 놀라운 사경회를 마치고, 각지로 돌아가 큰 열매를 맺었다

.

몇 일 후에는 전국의 장로교회에서 뽑힌 여자 성도 550명이 12일간의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모여 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500여명의 여성도들이 12일간 성경을 공부하려고 모여든다면, 우리는 큰 부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주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어머니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일보다는 카드 파티에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여자 성도들은 우상과 점복 등

마귀의 모든 일들을 버릴 때 화투 놀이도 함께 버렸다.  이 550명의 여성들은 모든 비용을 스스로 감당했다.  그들 중 두 여인은 닷새 동안 걸어서 도착했고, 그 중 한 어머니는 아기를 업고 있었다. 

이 무렵 평양에 있던 선교사들과 부흥의 지도자들은, 만일 영적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성령께서는 언제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도구가 될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첫날 저녁부터 성령의 인도를 구하였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임하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성도들을 책망하기

시작하셨다.

시어머니들이 변화했을 때많은 사람들이 집회 첫날 저녁에 거리끼는 것들을 다 벗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베어드 선교사가 말하기를, 몇몇 부녀들은 마치 발에 찔린 가시 같고 터지지 않은 종기 같은 문제들을 수일 동안 끌어

안고 갔지만, 결국 그들도 순종하게 되었고, 승리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성령)가 사경회 기간 중 그들을 가르쳤고, 그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변화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인들은 성령이 충만하였다. 남편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고, 자녀들도 그것을 보았다. 

며느리들의 눈에도 그 변화가 보였다.  동양에서 시어머니는 흔히 며느리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며느리들은 자살을 통해 그들의 역경을 벗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많은 시어머니들이 변화되었다.  또 그 사경회에 참석했던 며느리들도 변화되었다.  그들은 더 부지런해지고 마음은 더 넓어졌다.  믿지 않는 이웃들도 이런 변화들을 볼 수 있었으며, 이로써 주님은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다.

 

이 부녀 사경회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장로교 신학생 75명이 3개월간의 공부를 위해 평양에 도착했다.  그들은 5년 과정으로 매년 3개월씩 공부하였다.  당시의 평양신학교는 200여명의 학생이 있는 세계적으로도 큰 신학교였다.  이때 커리큘럼을 짜던 교사들은 학기 중에 매일 저녁, 기도회와 성경 공부를 갖도록 하여, 3개월 간의 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성령이 이 젊은 학생들을 충만케 하시기를 원했다. 

그러나 근간에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속 행하신 기사를 상기한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마치 성령을 향해서“우리가 학기 중 최선을 다하겠으니, 그 후에 성령님이 오셔서 이 학생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이 죄를 고백하고, 첫날 저녁부터 학생들을성령님께 맡겼다.

그 들의 믿음은 열납되었고 성령께서는 기사를 행하셨다.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이신 성령께서는 그 전에는 전혀 허락하지 않으셨던 진리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셨고, 5만 명의 새 신자가 교회에 더해진 그 해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한국에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일들은 한국 교회가 약속하신 성령을 구하며 또 성령님께 순종하는데 있어서 초대교회처럼 신실했다는 것, 따라서 참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 고국의 교회들은 이 사실 앞에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한국 교회의 기도에 대해 검토해 보자.  기도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들이 보인 매우 현저한 특징이었다.  한국 교회도 기도에 크게 의지하였다.  앞서 말한 평양의 고등학교에서 감리교 학생이 성령에 저항하고 있는 동안, 장로교 학생들은 얼마나 큰 부담감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였던지, 그 모습에 드러날 정도였으며, 승리가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하며 금식하였다. 

그 당시 소학교와 중학교에서도 성령이 얼마나 강력하게 역사하였던지, 학교 문을 잠시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책을 들여다 보는 어린 학생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선교사들도 한국 교인들이 기도에 있어서는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한국 성도들은 밤을 거의 기도로 새우는 일이 흔하였다.  그들은 새벽 동트기 훨씬 전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으로 되어 갔다. 

 스월렌(Swallen) 선교사가 한번은 어떤 개척지에 나갔을 때, 다음 날 새벽 5시에 모두 모여 기도회를 갖자고 하였다 한다. 

다음날 아침 5시에 스왈렌 선교사가 교회에 와 보니 세 사람이 무릎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아직 안 나왔나 보다 생각하면서, 얼마 동안 기도하였다. 

이윽고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스월렌(Swallen) 선교사에게 말하기를, 기도회는 선교사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마치고 다들 돌아갔으며,

그들 중에는 멀리 산길을 넘어온 이들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네 시 반에 모이는 기도회길선주 장로가 평양중앙교회의 목사로 시무하게 된지 수 년 후, 그는 많은 성도들의 사랑이 식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장로들 가운데서 가장 신령한 한 분과 의논하고 두 사람이 매일 새벽 4시 반에 예배당에서 만나 기도를 하기로 하였다.  두 사람이 이 기도회를 계속하는 동안 그것을 알게 된 교인들도 참석하게 되어, 그 달 말에는 약 20 명이 기도회에 나오게 되었다.  이제 공식적인 기도회를 광고할 때가 무르익은 것 같았다.  주일날 길 목사는 교회에서 매일 새벽 4시 반에 기도 모임을 가질 것이며 그 전 4시에 교회 종을 치겠다고 광고하였다.  이튿날 새벽 2시에 이미 400명의 성도가 예배당 밖에 기도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4시 반에는 600명이 모여들었다.  그 주간이 끝날 무렵에는 700명이 매일 새벽 모였으며 성령은 그들의 마음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다.  이렇게 영안이 밝은 목사를 모신 성도들은 복된 자들이다. 

아, 우리는 얼마나 낮은 형편에 떨어졌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주님이 계신다.  그러나 아무리 영광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새벽 4시 반에 우리가 일어날 것을 상상해 보라!

 

세계에서 제일 큰 기도회는 한국 서울에 있다.  1년 동안 매주 기도회(수요기도회; 역자 주)에 참석한 평균 인원 수는 1100명이었다. 

어느 수요일 저녁 나는 카나다의 토론토 시에 있는 멋진 장로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했었다. 

그날 저녁은 특별 순서로서 한국에 나갔던 선교사가 설교할 예정이었다. 

내가 얼마동안 혼자 앉아 있노라니까, 이윽고 점잖아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얼마 후 곧 집회가 시작될 시각이 되었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그 예배당의 좌석은 빈 곳이 많았다. 

나이 든 그 신사는 주위를 둘러 보면서“왜 이렇게들 기도회에 안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라고 말했다. 

 내가 “기도를 믿지 않으니까 그렇지요”라고 대답하니, 노인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인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덧붙였다.“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그 곳에는 내가 있으리라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저들이 믿는다면 이렇게 출석을 안 할 리가 없습니다.”주께서는 기도에 게으른 우리를 그냥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한국 교회는 또 가정예배를 중요시한다.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인은, 한국 교회에서는 제명을 당할 위험성마저 있다. 

카나다에서는 이 세상 일에 바쁜 나머지 식사 전에 잠시 기도를 드리는 시간까지 빠뜨리고 지나는 크리스찬 가정도 있다.  푸-트 선교사에게서 들은 말인데, 한번은 그가 한국 어느 산골 지역을 순회하고 있었다. 

 동행하는 사람들이 “저기 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에 들어가서 크리스들을 방문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럽시다. 나는 저 마을에 신자 가정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보니, 세례 받을 준비를 갖춘 사람들과 학습 문답을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푸-트 선교사가“여러분은 가정 예배를 드립니까?” 하고 물으니

,“예, 하루에 두 번씩 드립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는 가정이 몇이나 됩니까?”“스물네 집입니다.

”그 마을은 모두 24 집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집집마다 가정제단이라니!

 

만주에 있던 어느 선교사가 전도사 두 사람을 평양에 보내서 이 부흥의 자초지종을 듣고 오게 하였다.  전도사들이 돌아왔을 때, 한국의 선교사들은 길가에 전도소들을 많이 세웠더냐고 묻자 그들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모든 신자들이 전도소 노릇을 하고 다니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  믿는 노동자들은 크리스찬이 없는 시골에서 여름을 지내며 전도한다고 한다. 

행상인들도 이곳 저곳 여행하면서 언제나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말하고 다녔다.  우리가 동해안 지방에 갔을 때 그곳에 살던 모자 행상인 한 사람은 부흥회에서 구원받은 후 1년 만에 크리스찬 공동체를 10군데 이상 세웠다고 한다. 

 그 중 한 모임에는 17명의 신자가 있었는데, 그들 중 한 학생은 1달 동안의 방학을 이용해서 근처의 미전도지역에 들어가 전도한 결과, 100명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다. 

또 한 학생은 매일 적어도 여섯 사람에게 그들의 영혼구원에 대해 말해 주기로 결심하였고, 9개월이 되었을 때 보니 3000명에게 전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우리 본국 캐나다 신자들 중에는 한 평생 걸려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송도에 선교부를 가지고 있던 남감리교회는 자금이 부족하여 학교 건물을 세울 수 없었지만, 공부하기를 열망하는 청소년이 150명이나 있었다.  이때 전에 문부대신을 지냈던 윤치호씨가 자진하여 이 청소년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학생들은 그의 지도로 통나무 기둥을 세우고 짚으로 지붕을 덮은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길 목사가 새벽기도를 통해 어떻게 성도들을 부흥시켰나 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당시 그 목사가 쓴 편지를 보면, 이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자 마자 길가에 쏟아져 나가 심지어 8-9세의 어린 학생들까지 지나가는 행인들의 소매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구주 예수께 돌아올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최근 3-4일 간 근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와서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라고 편지는 말한다.  그들의 마음을 찌른 것은 어린 학생들의 간곡한 권면이었다고 한다.

 

국내에 있는 섬들에까지 복음을 전파한 한국 교회는 이제 이웃나라로 눈을 돌렸다.  수 년 전 서울에서 모였던 장로회 총회에서는 중국의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선교사에 지원하는 사람을 초청하니, 온 회중이 다 일어나서 지원했다고 한다.  그 중 4사람이 선택되었는데, 다른 지원자들은 모두 이 선택된 이들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은 고국 교회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일이다.  거저 받은 은혜에 한국 교회는 온전히 감사할 줄을 알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이 은혜를 거저 나누려고 했던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아낌없이 주어졌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1917년이 되었을 때에도 길 목사가 동해안 지방에서 사경회를 인도한 일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던지, 사람들은 그 즉시 마음이 녹아, 자신의 죄를 자백하였다고 한다. 

전능하신 성령께서는 이때 한국에서 행하신 바와 똑 같은 역사, 즉 성령의 구로하는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이 일을 언제든지 하고자 하시지만, 오늘날의 미국이나 캐나다에는 이런 일을 위한, 순종하는 통로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슬픈 일이다.

더 바칠 수 없어서 우는 성도초대교회의 아주 현저한 특징 중 또 하나는 아낌없이 바치는 일이었다. 

 

 한국 성도들 역시 이 특징을 현저하게 나타내었다.  어느 선교사는, 성도들에게 돈 소리를 감히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성

도들이 늘 너무 많이 바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기독교 국가에서도 자신의 성도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목사를 만나고 싶다.  그 선교부에 내가 있던 그 해에, 그 지방 교인들은 남녀 교직자와 성경학교 교사 등 도합 139명의 생활비를 부담하고 있었는데 그 해에만 그러한 유급 교직자가 57명이나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그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였다.“교회가 너무 좁아져서 우리는 1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교회당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교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바쳤습니다. 남자들은 시계를 바쳤고, 부인들은 패물을 바쳤습니다. 토지의 소유증서를 갖다 바치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그들의 소유를 전부 바쳤으며, 더 바칠 수 없어서 우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교회를 빚지지 않고 지을 수 있었습니다.”


또 어떤 선교사 한 분은 매우 빈곤한 개척지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교사에게 와서 하는 말이,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주 불편하던 차에, 마침 신축하기에 적당한 땅이 30불에 나온 것이 있으니 사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선교사는“그것 싸군요. 어서 가서 사십시오”라고 말했으나 그들은,“목사님 우리는 몹시 가난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 형편을 모르십

니다. 목사님이 돈을 좀 내주시면 좋겠습니다”“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 땅은 여러분께서 사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선교사가 말했으나, 신자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형편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때 부인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남자들이 무슨 대책이 없으면 우리라도 어떻게 해 봅시다.”여자들은 패물을 모두 모아 팔았다.  그러나 그것은 10불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고 어떤 부인은 솥을, 혹은 놋쇠 그릇, 놋쇠 수저까지 팔았다.  그들의 식기는 모두 놋쇠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20불을 만든 그들은, 30불을 가지고 가서 그 땅을 샀던 것이

다.  뿐만 아니라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대로, 이 부인들은 더 큰 비전을 품게 되었다.  즉, 그들이 사는 고장 부근에 있는 수많은 촌락들에 하나님을 모르고 소망 없이 살아가는 여인들의 필요를 생각하며 마음 중심이 뜨거워진 그들은, 그 후 매달 6불씩을 모아서 여전도사 한 명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지방에서, 신축한 예배당의 헌당식에, 선교사가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건축비로 50불의 부채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한 교인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목사님, 다음 주일에 그 빚을 갚도록 제가 50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는 그 교인이 매우 가난한 처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혼자 하실 생각 마십시오. 우리가 다 함께 힘을 합치면 곧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고국의 교회들 중에는 5만 불의 빚을 지고도 염려하거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교회들이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다음 주일이 되자, 그 가난한 교인은 50불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선교사는 놀라서 물었다. “이 돈이 어디서 났소?”그 교인은 대답하기를,“목사님, 염려 마십시오. 이것은 다 깨끗한 돈입니다”라고 하였다.  몇 주일 후 선교사가 그 지역을 방문하다가 그 교인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주인이 어디 계시냐는 물음에 그 집 부인은“밭을 갈고 있소”라고 대답했다. 선교사가 밭에 나가 본즉, 늙은 아버지는 뒤에서 쟁기 손잡이를 잡고, 아들은 쟁기를 끌고 있었다. 

선교사는 놀라서 물었다.“웬 일이요? 소는 어떻게 되었소?”그 교인은 대답하였다.“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불신자에게 50불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소를 팔아 갚았지요.”

 

또 한 가지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와 동일한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열심이었다.  부흥이 일어났을 때는 필요한 성경을 미처 인쇄해 내지 못할 정도였다.  평양에서만 1년 동안에 6000권의 성경이 팔렸다.  신도들은 모두 성경을 공부하였으며, 가장 무식한 부녀들도 공부에 열중하였다.  용무로 타지에 가는 신도들은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떠났다.  그들이 길가에서나 여

관에서 성경을 펴 놓고 읽을 때, 주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앉게 되고, 결국 구원을 얻었다. 

 

우리 미주의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이렇게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번은 내가 미국에서 기차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는데, 옆에 앉았던 손님이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용서하십시오. 지금까지 저는 기차를 타고 성경이나 기도책을 읽는 사람은‘프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other)’이나‘카톨릭’신부 밖에는 보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어느 쪽이십니까?”“저는 둘 중 아무 것도 아닙니다”“그러면……?”“저는 중국에서 돌아온 선교사입니다.

” 어째서 책 중에 최고의 책을 차 안에서 읽는 일이 신기하게 보이는 것일까?  나는, 성직자나 장로, 집사가 배나 기차 안에서 몇 시간씩 카드놀이를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한국에는 먼저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판단할 자격이 있고, 그것이 다 끝나고 젊은이 차례가 되었을 때라야, 무언가 노인들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기독교 국가에서도 이런 것은 잘 실천되지 않고 있다. 

우리 시대에는 젊은이들이 비판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오래된 권위가 성경에 있다는 것을 한국 성도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먼저 성경에 비추어서 판단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감히 판단하려고 드는 사람은 없다.

 

 나는 이러한 성경에 입각한 판단방식을 찬성한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약 온 교회가 한국 신도들 같은 겸비함으로 성경 앞에 나간다면, 이 세상에 있는 신학교 도서실에서는, 옛날‘바울’이 전도했던‘에베소’서 불태운 서적들보다 더 많은 책들을 불사르게 될 것이고 이는 또 전세계적인 부흥을 일으킬 것이다.

 

일본 관헌들에 의해 불법으로 투옥당한 목사, 전도사, 장로들은 감방에 들어오자 쓸데없는 불평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곧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는 감방에서 성경을 일곱 번 통독하고 나서

“내 주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인 줄 전에는 상상도 못했소!”라고 탄복하였다.

 또 다른 분은 일본 경찰이 성경을 빼앗아 버릴까 염려하여 성경을 암송하기 시작하였는데,

로마서를 다 암송하고 요한 복음을 암송하다가 풀려났다고 한다.

 만약 서양의 기독교 국가에서도 실제로 핍박이 일어난다면, 성경의 고마움을 아마 오늘날보다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온 마을의 가정이 다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게 발견한 그 마을에서 푸-트 선교사는 25명에게 세례를 주게 되었다. 

그는 첫 번째 성도에게 성경 구절을 암송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예”하고 대답한 그는 바로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이 100 구절쯤 외웠을 때 푸-트 선교사는 그를 멈추게 하고, 다음 사람에게 성경 암송을 시켰다.  모든 사람에게 외우고 있는 성경 구절을 다 암송해보라고

하다가는 세례문답을 마칠 시간이 모자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는 25명의 세례문답 받는 신도들이 전부 100절 이상의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 교회가 그렇게 힘있고, 열매가 많은 원인 중 하나는 성경 공부에 있었다.  어느 해에는 1400개의 성경공부 반이 조직되어 90000명이 등록하고 공부하였다.  그들은 비용을 각자 스스로 부담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한 장소에 1800명이 모였다.  지방에서 모여든 신도들을, 신도들 가정에 다 유숙시킬 수가 없어서 일반 불신자들의 가정에도 유숙하게 하였는데, 이들을 유숙시켰던 불신 가정들도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한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노인들도 주일학교에 나와서 성경을 공부하였다.  우리가 평양에 들렀던 어느 주일날은 비가 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몇몇 교회를 찾아가,

대 예배 전에 모이는 성경공부 시간에 얼마나 출석하고 있는지 살펴 보았다.  어떤 교회는 그 이상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리만큼 자리가 차 있었다.

 

또 초대 교회의 신도들은, 주님의 복된 이름으로 인해 자기들이 고난 받을 만한 자가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한국 교회에서도 동일한 정신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시기의 마귀가 일본인들을 충동하여 한국 성도들을 핍박하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천의 기독교도들이 테라우찌 총독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는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쓴 사건이 있었다.  있을 수 없는 모함이었지만, 이를 구실로 일본 관헌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잡아 넣었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일본인들이 원하는 거짓 자백을 얻어 내기 위하여 성도들을 얼마나 잔혹하게 고문했는지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어떤 사람은 엄지손가락을 묶여 들보에 매달렸고, 혹은 달군 쇠로 지지우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일곱 번을 기절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끝까지 결백함을 나타내었고 법원에서는 그들의 무죄를 인정하고 석방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신자는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는 이유로 온 가문에서 배척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법에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온유하게 참으며 모욕과 학대 중에서도 계속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마침내 그의 온 가문이 회심하게 되고, 재산도 다시 찾게 되었다.어떤 사람은 읍내에 나갔다가 회심하여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마을에 돌아오자 그는 자신이 깨달은 놀라운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였고, 크게 분노한 친척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죽도록 때렸다. 

병원에 실려 온 그는 거의 죽음 직전이었다.  수 주가 지나 의사는 그에게 말하기를, 일단 퇴원해도 좋지만 언젠가는 출혈이 일어나서 사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성도는 성경을 많이 사 가지고 돌아왔고 3년간 자기 마을과 그 주변을 다니며 성경책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출혈이 일어났고 그 영혼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를 죽이려 했던 그 불신자의 마을에는 그를 통해 11개의 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분명히 성령 하나님께서는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한국 땅에서도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것은 이 동방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했던 것처럼, 안이한 우리 서양 기독교인들도 깨어 일어나 힘써 하나님을 찾으라는 도전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은 사람의 능으로나 힘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많은 사실로 증명하였다. 그들은 온전한 겸손으

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였고 그들을 통하여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흘러 넘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일하게 충만한 구원을 주시고자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지게 될 것이며(계 3:1), 이같이 큰 구원을 주신 이를 만홀히 여기는 자들에게 예비된 심판 앞에 설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출처 : [카페] 비젼 발전소 (http://cafe.daum.net/jmwm)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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