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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로마서 특강11-제1부 하나님의 의의 계시(롬 1_1-8_39) 김희중 목사 조회수 : 347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1-06-27

20210625 금 케노시스 성경대학(김희중 목사)

20210625 로마서 11

1, 하나님의 의의 계시 (1:1-8:39)

. 머리말 (1:1-17)

1. 인사말 (1:1-7)

2. 바울의 관심사 (1:8-15)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1:16-17)

. 정죄(죄가 있다고 판단하고 단정함) :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 (1:18-3:20)

1. 이방인의 죄 (1:18-32)

정죄의 원인 :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이 원인 (1:18-23)

정죄의 결과 : 하나님의 유기(버려두심) (1:24-32)

2. 유대인의 죄 (2:1-3:8)

진리에 따른 심판 (2:1-5)

행위에 따른 심판 (2:6-10)

공평한 심판 (2:11-16)

율법을 지키지 않음 (2:17-29)

약속을 지키지 않음 (3:1-8)

3. 전 인류의 죄 (3:9-3:20)

. 칭의 : 하나님의 의의 전가 (3:21-5:21)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3:21-31)

2. 의의 예증 (4:1-25)

3. 의의 결과 (5:1-11)

4. 의와 정죄의 대조 (5:12-21)

. 성화 :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6:1-8:39)

1. 성화와 죄 (6:1-23)

죄에 대하여 죽음(원리) (6:1-14)

죄에 대하여 죽음(실천) (6:15-23)

2. 성화와 율법 (7:1-25)

율법에 대하여 죽음 (7:1-6)

죄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는 율법 (7:7-25)

3. 성화와 성령 (8:1-39)

육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성령 (8:1-11)

양자의 권세를 주시는 성령 (8:12-17)

장래의 영광을 보증하는 성령 (8:18-30)

승리를 보증하시는 성령 (8:31-39)

지난주에 공부한 로마서 7장은 스도인과 율법의 관계설명하면서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문제는 마지 결혼의 의무 같은 것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는 율법을 남편으로 두고 그 율법에 매여 있었으나, 구원받을 때 그 사람(옛 육신) 이 죽으면서 율법(옛 남편)과의 결혼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새 사람(거듭난 사람/ 새로운 피조물)은 다른 남자(그리스도)와 결혼하게 되는 원리를 가지고 설명했습니다.

옛 남편(율법)과의 관계에서 사람이 낳을 수 있는 태의 열매는 사망에 이르는 열매밖에 없었으나 섀 남편과는 하나님께 대한 열매 대한 열매맺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결혼관계 속에서도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새로운 결혼관계 안에서 내 속사람(새 사람)은 그리스

도와의 결혼관계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를 원하나, 내 육신 (지체/ 것 사람/ 사망의 몸)은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모순으로 인해 사람이 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면 참으로 끔찍하고 비참하게 느끼게 되면서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

이제 바울은 8장에서 성령을 따라 걷는 삶을 소개 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생각으로는(새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옛 사람/죄의 몸) 죄의 법을 섬기는 이중적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로인한 정죄는 이상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은 여전히 죄에 대해 취약하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대적하거나 고소하거나 정죄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 어떤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Rom 8:1 [성령이 주시는 생명]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죄받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으므로 그 죄와(율법의 정죄) 분리가 일어나서 이혼이 된 겁니다. (원래 그냥은 이혼이 안 되는 건데 한쪽이 죽으면 이혼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죄는 안 죽습니다. 죄는 내가 죽을 때까지 절대 먼저 죽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결국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가 죽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민이죠?

그래서 내가 죽으면 지옥 가니까 나를 대신하여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대속의 속죄 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결별할 수 있도록 된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계명을 지키면서 율법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사랑의 법)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고자 할 때에는 그 모든 율법이 우리에게 아무 구속력을 갖지 못하니까 죄가 힘이 다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율법을 범해도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시니까 죄가 힘이 빠져버리는

거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난 죄가 다 용서된 겁니다.

율법을 어긴다고 해도 정죄가 없다 하니까 너무 감사해서 다시 죄 지을 마음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설수도 있고, 실족도 있고, 허물이야 있을 수 있지만, 기를 쓰고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을 바울이 발견하고,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1)너를 해방하였음이라

Rom 8:2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이제는 정죄하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레위기에 있는 율법과 규례를 우리가 어긴다 해서 정죄하고 이런 것은 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지키면 우리에게 유익하고 거룩하고 복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 지킨다고 해서, 못 지킨다고 해서, 정죄하는 것이 없으니까 죄가 아주 김이 빠지는 거죠.

그래도 마귀는 그런 율법을 자꾸 어기게 만들어가지고 사람이 추하게 되고, 악하게 되어서 전도하지 못하게 하는 그

런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에 감격하고 사랑에 감격했을 때만, 그리고 충만할 때만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늘 구속의 은혜에 감격해서 살아야 되는 거지요.

여러분 보세요.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Rom 8:3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죄의 지배를 벗어나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거니와 또 실제로 지키려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보내 우리의 죄를 없앨 희생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는 죄를 멸하신 것입니다.

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Rom 8:4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며 육신의 죄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4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영을 따라 행하는

여러분,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영을 쫓아서 행하면서 율법보다 더 수준 높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사실은 율법이 할 말도 없죠.

그래서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해서도 그런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려하고, 또 율법을 어긴다 할지라정죄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죄성이 김이 다 빠져버리는 거예요.

죄의 정욕이 사람을 충동하여 죄를 실컷 짓게 해봐야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다는데하면서 죄가 점점 힘을 잃어 버리는 거지요. 그러니까 율법이 없으면 죄도 힘을 잃어버려요.

런 원리를 깨달은 게 바로 로마서예요

로마서 6, 7. 8장은 이 원리가 핵심주제예요.

그래서 그렇게 된 사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할 뿐 아니라 그 율법보다 더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어요.

그러니 율법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는 사람에게 율법은 아

무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러므로 정리해 보면 이런 겁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두 가지 법으로 인하여 오는 고통을~ 호소한 후에 그 고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극복됨을 선언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그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1,2)"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자란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임하는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을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3,4절은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그 은혜로 인하여 죄인에게 임하는 축복이 무엇인지 이렇게 말해 주고 있는

, ...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주님의 대속의 은혜는 이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오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신 거에요.

그러므로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라고 선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선포가 있을 때 겉사람"속사람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으로 인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고통으로 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다시 돌아볼 것은.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Rom 8:5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삽니다.

5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여기서 은 중생한 자에게 가하시는 성령이시고, 이에 반대되는 육신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타락한 인간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로서 인간의 본성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말하는 것인 반면에, 영을 따르는자거룩하신 인격이신 성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 성령의 소욕에 지배된 삶으로서 하나님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를 말하는 거지요.

그러나 영을 따르는 자일지라도 그 속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과 투쟁하는 죄의 법이 공존합니

.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Rom 8:6 성령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만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Rom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뜻대로 산 사람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일도 없고 또 결코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7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반발하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가면 항상 하나님께 반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 주심에 대해서 감격함으로가 아니고,

법에 대해서 계속 반발합니다.

정말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Rom 8:8 그러므로 아직도 옛날의 죄에 물든 자아의 지배를 받아 육신의 욕망대로 따라가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8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산도 안 기쁘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항상 교회에 오면 기분 나쁜 거에요.

매사에 반발하는 심리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그래요.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Rom 8:9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사정이 다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의 여러분 속에 계시기만 하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9 사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말합니다.

그가 바로 '신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산자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수식어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9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거지요.

이렇게 말씀 드릴 때 곤란한 것은 과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는 것입니다.

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란 성령 하나님음 말합니다.

즉 성령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 산자인데 성령이 있다는 것을 무엇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령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함으로서 믿음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

.

소위 신오순절 파라고 하는 순복음 교단은 성령이 있는 가장 큰 증거를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방언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신자된 증거는 '방언입니다.

방언만 하면 그는 산자이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때문에 신자된 증거를 갖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방언의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방언을 한다고 해서 신자된 것이고, 또 인위적인 훈련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 방언이라면 성령이 무엇 때문

에 오셔야 하는 것입니까?

그냥 인간의 노력과 훈련에 맡기면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성령이 임한 증거를 소위 뜨거운 기도나 열정 있는 찬송. 교회에 대한 희생과 봉사 등등으로 말하기도 하지

만 성경에서는 성령의 증거를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있는 증거는 감정적인 체험이나,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마음의 뜨거움을 느끼고. 무아지경에 빠져서 '주여라고 목이 터져라고 외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펄펄 뛰

는 것을 성령이 임한 증거라고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분위기만 적당히 만들어 주면 누구나 그 분위기에 취해서 그

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젊은이들의 케이팝공연하는 것 보세요

여러분, 성령은 뜨거움도 아니고 열정도 아닙니다.

흔히 자신의 마음 상태가 뜨겁지도 않고, 열정도 없으면 신앙이 식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속는 것임을 알

아야 합니다.

반대로 분위기에 도취해서 잠깐 마음의 뜨거움을 느끼고서는 성령을 받았다느니 은혜를 받았다느니 하면서 그리스도

의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할 때, 그것도 역시 스스로 속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름과 겨울, 방학의 계절만 되면 교회마다 열심히 하는 것이 수련회입니다.

청년들이나 대학생. , 고생들의 신앙수련이라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생각하는 수련회의 성공기준은 참석

한 학생과 청년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열정적인 찬양과 부르짖음의 기도와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샤우팅(외침, 포효하듯 소리를 내지르는 창법. 열정적으로 찬양하며 부르짖읍의 기도시간) 이라

고 하기도 하고 열광하는 시간을 갖게 하고, ”캠프파이어등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쓴 종이를 태우고 예수님의 용

서 하심을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행사와 강의를 하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단

을 하게 함으로서 수련회가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자칫 신앙에 대해 큰 오해를 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그

렇게 분위기로 변하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고 결단을 했다고 그것으로 변화되었다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겁니다.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2)살아 있는 것이니라

Rom 8: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속에 계신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육신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용서해 주셨으므로 여러분의 영혼은 살 것입니다.

10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Rom 8:11 그리고 만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속에 계시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속에 계시는 이 성령에 의해서 여러분이 죽은 후에도 여러분의 썩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11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가 안에 있는 신자는 그 몸은 죽었지만 영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한 사람은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여기게 되고, 죽어야 할 내가 그리스도의 의

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증거예요.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초월적인 능력과 색다른 마음과 감정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 아닌 거지요.

인간은 성령이 임함으로서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나는 죽어야 할 자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내가 그리스도의 의 (하신 일.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산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에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증거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어떤 감정의 변화나 행동에 대한 변화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은 이제는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인식했을 때 가능한 거에요.

자신에 대해서 그 어떤 가치도, 영광도 두지 않고 오직 죽어 마땅한 자로 인식하게 될 때, 죽어야 할 나를 살린 그

리스도의 의( 하신 일.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 새로운 생명으로 가슴속에 파고 들어오는 거예요.

여러분.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거듭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죽고 다시 산 인간입니다. 성령이 거하시면 내가 바로 죽어야 할 몸이라는 것을 안

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단지 안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죽을 몸이기 때문에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인간은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을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 거지요.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나는 죽어야 할 자이지만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살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삽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을 대신 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못합니다,

오직 에수님의 은혜만 말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양자의 권세를 주시는 성령 (8:12-17)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Rom 8:12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육신이 어떠한 것을 요구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줄 의무는 조금도 없습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에 빚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Rom 8:13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고 장차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의 악한 행동을 깨뜨려 버린다면 여러분은 살게 될 것입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그래서 끝없이 우리가 우리 육신 속에서 내 생각처럼 자꾸 들고 일어나는 것을 죽여야 됩니다.

그것을 죽이지 못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버리면 반드시 망하는 거에요.

그래서 영을 따라 간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간다는 것인데, 말씀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가게 되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14,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Rom 8:14 하나님의 영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14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Rom 8:15 우리는 노예처럼 아첨하거나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자녀로 영접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성경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는 물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그들이라는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조건에 더 이상 관심을 두거나 다른 것을 첨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다는_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할 떄 많은 사람들은 신비한 경험 쪽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영이고, 그 영이 우리를 인도한다면 분명 뭔가 신비한 방법으로 인도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음성을 들었다느니, 환상을 봤다느니, 꿈에 뮐 봤다느니, 하면서 그것을 성령이 인도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들 가운데 기도해 보니까 아니더라 고 할 때 과연 무슨 음성을 들은 것입니까

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따로 하나님이 무슨 계시를 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자기 욕망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까맣게 모른 채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모습들이 난무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란_육신을_로 가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육신을 부인하게 하고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신 보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인도를 강제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강제으로 끌고 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사고자체를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오심으로서 무엇이 죄악 된 것이고,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게 하셔서 죄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된 인간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만이 인생에 최고로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자연히 육시느이 생각을 죽이고, 세상에 미련 두지 아니하고, 최고의 가치 있는 분을 스스로 쫓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쫓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가게 되고, 자연히 그 속에서 사랑과 봉사와 섬김과 헌

신을 추구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비록 자신에게서 사랑과 헌신과 섬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모습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내세워 형제를 판단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자기 구원을 확인하는 차원에서생 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일에 대한 결과우리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_

하나님이 하신일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곧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 기뻐하는 사람이지, 자기 구원의 확신으로 기뻐하는 자가 아닙니다.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니라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버지를 부르지도 않습니다.

이미 아들과 아버지는 부자지간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산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찾아내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

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관계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산자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관계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신에게서 아들의 자격을 찾을 필요가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

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 관계를 증거하고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되고 두려움 없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무서워하는 종으l_영을 받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없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혹시 지옥 는 것아닌가?이런 두려움은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함께 한 모습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어떤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핑계 삼아서 아들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낳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고 마음대로 죄 짓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십니다.

때로는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자녀가 아니라면 이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l2: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은 신자는 아버지의 징계까지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목인 하시고 허허 웃으면서 넘어가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다 들어주신다는 것으로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자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아들이지, 아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일 처리를 해주는 아버지는 아닙니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벗어날 때는 언제든지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를 부르며 사십시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아버지의 뜻을 드려내는 아들답게 살게 해달라고 부르십시오.

아버지를 사랑하신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르는 자신을 치면서 아버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바로 양자의 영으로 인도 받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Rom 8:16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말씀하시며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Rom 8:1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께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의 재산을 분깃으로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그 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면 그분의 고난에도 함께 동참하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성령이 우리를 위해 일 하신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자칫 인간으로 하여금 무사 안일함을 조장하는 것과 같은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령께 맡기자는 말이나 '하나님께 맡기자는 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도 우리가 하다가 할 수 없는 것을 맡겨야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고 손 놓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회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주장이 뭔가 그럴듯한 논리로 들려질 수 있지만, 사실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고 인간

의 힘으로 해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고후 1:21-22절을 보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_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 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상속자(대를 잇는 아들, 상속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 너희는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은행에서 돈을 대출 받을 때 대신 갚아 줄 수 있는 돈 있는 자를 보증인으로 내세우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행에서 돈 있는 자를 보증인으로 내세우라는 것은 '실은 딩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안 될 때 당신의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 자를 보증인으로 세우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시켜보고 우리가 안 될 때 성령으로 하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생각하지는 마세요.

인간은 시켜보고 자시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창세기부터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구약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지 ' 수 있다. 시겨만 주십시오. 해 보겠습

니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무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저와 여러분의 실패입니다.

그 실패를 보여주심으로서 결국 성령을 보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윌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 우리의 힘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게 오셔서 우리를 굳게 붙드심로 이루어진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려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 차츰 차츰 구원이 완성되어 간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이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

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입니.

그래서 신자는 성령이 오셨다는 것으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댜

때문에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약속을 실패하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성령님으로 더불어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 하시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놓고 성령을 믿고 실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원에 대해서는 실패한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핑계 삼아서 자신의 실패를 즐긴다든지 실패에 대해서 안심을 한다면 그것은 성령님이 함께 한 모

습이 결고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 자산의 연약함을 깨닫고 우리를 성공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

게 하시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함께 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는 필히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16절인데 읽어 보세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 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이 친히 증거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신자 된 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증거가 보여 져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9절과 14절에서 신자는 성령이 있는 자이고, 성령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 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인도함 받는 것임

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한다는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신자를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세우시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령의 증거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해

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방언을 한다든지. 병을 고친다든지, 이상한 꿈을 꾼다든지, 몰랐던 성경이 깨달아진다든지, 이렇게 자기

체험을 통해서 성령의 증거가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을 자기체험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에 지나지 않

습니다.

그러므로 체험이 없다고 해서 성령의 증거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성령의 증거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무슨 체험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결국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17절에 나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는 이 말씀이 성령의 증거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자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자녀란 곧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녀입니다.

자녀라고 해서 하늘의 것을 누리는 영광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자녀의 의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는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상속자입니다.

그분과 함께 한 상속자라면 그분이 가신 길은 곧 오늘날 우리들이 가는 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실 때 그 증거물은 고난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체험을 증거로 생각해 버리면 결국 모든 신자에게서 성령의 증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받지 못한 신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4:4절에서는 성령이 하나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든 산자에게 함께 하는 성령님은 한분이시고 같은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성령님의 증거가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져야하는 증거이기에 자기 체험을 성령의 증거로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3장에 보면 에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의 위에 임하셨습니다.

이것은 에수님의 힘이 부족해서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힘을 보태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령 받았다는 것은 연약한 신자에게 힘을 부여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에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

.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입니

.

그래서 마 4장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것도 '성령에게 이끌리어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말씀하는것

입니다.

성령에 이끌렸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된 삶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공생애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면 결국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녀 된 신자의 삶을 채운 채

나타나게 되어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끄시던 성령님이 오늘 하나님의 자녀를 이끄신다면 결국 그리스도가 가산 고난으로 이끌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이 증거 하실 때 그 증거는 신자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채움으로서 드러

납니다.

결국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성령의 증거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이 에수님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한 상속자

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에수님의 삶으로 채우라고 하니까, 에수님이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매 맞고, 창에 찔리고 죽은 외형적인 것을 채

우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가 우리 속에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원리가 곧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신자의 삶의 차이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차이가 아니라 원리가 다

르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성령의 증거

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고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생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도 고난 받자라고 하게 됩니다 고난을 착한

일을 하는 고생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 고생을 내보이면서 사랑했다고 하고 희생했다고 하면서 설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로 채우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가는 삶이기에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가기에 육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I: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로마서 8장 후반부는 (8:18-39) 다음 주에 이어 가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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